항목 ID | GC028005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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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敞邑城內斥和碑 |
영어음역 | Gochang Eupseong Nae Cheokhwabi |
영어의미역 | Stele Rejecting Reconciliation in Gochangeupseong Fortress |
이칭/별칭 | 척화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산 9[모양성로 1]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진돈 |
성격 | 척화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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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월석 |
건립시기/일시 | 1871년 |
관련인물 | 흥선대원군|김동석 |
재질 | 화강암 |
높이 | 107㎝ |
너비 | 39㎝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산 9[모양성로 1] |
소유자 | 고창군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에 있는 개항기 척화비.
[개설]
고창읍성 내 척화비는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에 의해 척화비를 세우라는 명령이 내려지자, 고창 지역에서는 이듬해인 1872년(고종 9) 고창현감 이동석(李東奭)의 주도 하에 모양성 내 공북루 오른편에 세워졌다.
이후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어 갔을 때 일본공사의 요구에 의하여 척화비가 모두 철거되었으나 현재 일부가 전국적으로 남아 있다. 서울의 경복궁과 부산, 함양 등에 척화비들이 남아 있으며, 전라북도에는 익산 여산동헌과 고창읍성에만 남아 있다.
[건립경위]
1866년 프랑스가 자국 선교사의 처벌 등을 문제 삼아 7척의 군함으로 조선을 침략하는 병인양요가 일어났고, 1868년 오페르트의 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 이후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의 침략을 물리친 후, 흥선대원군은 1871년 쇄국양이정책을 내세워 서울의 종로 사거리를 비롯한 중요 도시에 척화비를 세우도록 명령을 내렸다.
[위치]
고창 모양성 주차장에서 공북루를 거쳐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있다.
[형태]
비석의 크기는 107×39×22㎝이고, 형태는 이수와 귀부가 없는 월석이다.
[금석문]
비석에는 “洋夷侵犯非戦則和主和賣國戒我萬年子孫丙寅作辛未立上之九年壬申五月日行縣監李東奭奉教立[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는 만 년 동안 길이 자손에게 경계해야 한다. 병인년에 만들어서 신미년에 세웠다. 임신 오월에 현감 이동석이 교서를 받들어 세웠다]”이라 음각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고창읍성 내 척화비에는 건립 시기와 건립자가 정확하게 명기되어 있으며, 교서를 받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