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7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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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天秀 |
영어음역 | Gang Cheonsu |
이칭/별칭 | 중민(仲民),거산(巨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이기화 |
[정의]
일제 강점기와 현대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
[개설]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중민(仲民), 호는 거산(巨山)이다. 1863년 지금의 전라남도 장성군 서삼면 장산리에서 태어났다. 강희맹(姜希孟)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춘파(春坡) 강인회(姜寅會)이다. 1832년 강인회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장성으로 이거하였다.
[활동사항]
강천수(姜天秀)는 할아버지 강인회의 권유에 따라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경전과 백가서(百家書)를 배우고 익혀서 학문과 문장에 일가를 이루었다. 1897년(고종 34) 종숙인 강해영(姜海永)의 권유로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로 이사한 뒤 서당을 열고 후진을 교육하였다. 1908년(순종 2) 기우만이 의병을 일으키자 달려가서 도와주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고향에 은거하며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힘썼다. 만년에 제자들이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암치리 서쪽 계곡에 정자를 지어 거산정사(巨山精舍)라는 편액을 달고 쉴 곳을 마련하였다. 그는 괴이한 재기가 넘치는 호걸로 학처럼 우뚝한 선비였는데, 붓을 들면 물이 흐르듯 하여 다시 다듬어 시문을 꾸미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1951년 향년 89세로 죽었다. 묘소는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에 있다.
[저술 및 작품]
강천수는 가학(家學)을 계승한 뒤 기우만의 문하에서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했으며 스승 기우만의 학설을 승계하였다. 특히 그는 기정진의 「외필(猥筆)」과 「납량사의(納凉私議)」는 일찍이 없었던 도학의 기본이라고 신봉하였다. 기우만의 『송사문집(松沙文集)』을 비롯하여 『은휴집(恩烋集)』, 『치재집(癡齋集)』, 『모산집(茅山集)』, 『물기재집(勿欺齋集)』 등을 교정하고 다듬어서 간행하였다. 저서로 『거산유고(巨山遺稿)』 4권 1책이 있는데, 4백 수의 시문과 210편의 각종 문장이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