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07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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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卞成溫 |
영어음역 | Byeon Seongon |
이칭/별칭 | 여윤(汝潤),호암(壺巖),호암거사(壺巖居士)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
시대 | 조선/조선 중기 |
집필자 | 박노석 |
성격 | 유학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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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
성별 | 남 |
생년 | 1540년 |
몰년 | 1614년 1월 20일 |
본관 | 초계 |
[정의]
조선 중기 고창 출신의 유학자.
[가계]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여윤(汝潤), 호는 호암(壺巖). 문열공(文烈公) 변정실(卞庭實)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변원종(卞元宗), 할아버지는 직장 변응소(卞應韶)이다. 아버지는 증절충장군(贈折衝將軍) 변구(卞球)이며, 어머니는 청도김씨(淸道金氏)로 김유형(金宥亨)의 딸이다. 부인은 밀양박씨(密陽朴氏)로 박구(朴玖)의 딸이다. 동생은 변성진(卞成振)이다.
[활동사항]
변성온(卞成溫)은 어려서는 가학(家學)을 계승하였고, 성장하여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인후는 처음 그에게 『소학(小學)』을 읽게 했는데, 모든 언행과 거조를 한결같이 『소학』으로 준칙을 삼아 구용(九容)과 구사(九思)를 철저히 행동으로 실행하였다.
당시 그는 집이 가난하여 패랭이[平凉子]를 쓰고 스승 김인후가 사는 전라남도 장성까지 왕래하였다. 어느 날 길을 가던 중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자 다른 행인은 모두 비를 피하려 달려갔으나 그는 행보를 조금도 변하지 않고 걸었다. 이에 모두 조소했으나 뒤에 그가 변성온임을 알고 더욱 공경했다고 한다.
그는 성품이 온후하였는데, 학문은 근본과 실천에 힘썼으며, 문필을 가지고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당시 동문으로 금강(錦江) 기효간(奇孝諫), 고암(鼓巖) 양자징(梁子徵), 월계(月溪) 조희문(趙希文), 영응(永膺) 이지남(李至男), 양보(良輔) 윤기(尹祈), 고반(考槃) 남언기(南彦紀) 등 모두가 당대의 드러난 인물들로 변성온을 중심으로 교유했고, 특히 기효간이 더욱 그를 공경하고 소중히 여겼다.
그의 집이 있는 장연치 호암마을은 흥덕과 고창 그리고 무장 세 고을의 경계로서 인천(仁川)과 덕산(德山) 사이로 산수가 뛰어났다. 변성온은 이곳에 집을 짓고 영모정(永慕亭)이라 편액하고 스스로를 호암거사(壺巖居士)라고 불렀다. 일찍이 김인후가 이곳에 와서 지어 준 시 5수가 전한다.
변성온은 1555년(명종 10) 처음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만났다. 1560년(명종 15) 김인후가 사망하자 축단을 쌓았으며, 동문 기효간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변이중에게 김인후의 사당을 짓게 하였다. 또한 양자징에게 김인후의 행장을 짓게 하였다. 그 해 가을 다시 이황을 만났을 때 그를 위해 김인수가 지은 시 1수로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풀이하니 이황이 그것을 외웠다고 한다. 그 후 변성온은 이황과 함께 천연대(天淵臺)를 유람했는데, 이황이 한서암(寒棲庵)에서 여러 날을 묶고 떠날 때 시 8수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변성온은 역학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나무로 선기옥형(璇璣玉衡)[혼천의]을 만들어 천체를 관찰했다. 그는 우계(牛溪) 성혼(成渾)과도 교유하여 서신 왕래가 있었는데, 성혼의 답서에 “사업이 원대하고 공부가 독실하여 세상의 변태를 뜬구름 보듯 하고 군자의 지절을 지키며 산림에 안거했다.”고 썼다. 1614년(광해 6) 정월 20일에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호암집(壺巖集)』이 있다.
[묘소]
묘소는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의 두락암(斗洛巖)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97년(숙종 23) 나천추(羅天樞) 등이 상소하여 변성온을 기효간, 양자징과 함께 필암서원(筆巖書院)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다. 뒤에 고창읍 월곡리에 월계사(月溪祠)를 건립하여 아우 변성진(卞成振)과 정운룡(鄭雲龍), 오희길(吳希吉) 등과 함께 연벽으로 배향하였다. 변성온과 아우 변성진이 만년에 학문을 닦던 것을 기려 고을 사람들이 두락암에 두암초당을 건립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