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084 |
---|---|
한자 | 三養鹽田 |
영어음역 | Samnyang Yeomjeon |
영어의미역 | Samyang Salt Industry |
이칭/별칭 | 삼양 해리염전,해리염전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지명/시설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동호리 1|심원면 고전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종렬 |
성격 | 염전 |
---|---|
면적 | 991,736㎡ |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동호리 1|심원면 고전리 |
전화 | 063-563-6410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해리면 동호리와 심원면 고전리에 걸쳐 있는 염전.
[개설]
삼양사의 창업주인 수당(秀堂) 김연수(金秊洙)[1896~1979]는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당시 부안면 인촌리] 출신으로 1924년 삼수사를 창업하였으며, 1927년 줄포에서 처음으로 간척 사업을 시작하였다. 1931년에는 회사 이름을 삼양사로 변경하였다. 김연수가 고창군 해리면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36년으로, 해원농사주식회사라는 일본인 회사가 간척 공사권을 따내고도 5년여 동안 방치한 것을 이어받으면서부터였다.
[건립경위]
1946년 ‘전매 제2호’ 발령으로 민간 염전이 허가되면서 삼양사는 해리염전[삼양염전] 개설 인가를 받았다. 염전 축조 공사는 1947년 3월 시작하였으며, 1949년까지 94만 4132.23㎡가 축조되어 그해 처음으로 천일염을 수확하였다.
[변천]
현재 존재하는 염전 사무소와 소금 창고는 1939년 김연수가 지은 것으로 당시에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였다. 건물 중 일부는 1950년 6·25전쟁 와중에 소실되었으나 이후 신축되었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해리염전은 좌익과 우익의 각축장이 되었는데, 전쟁이 나기 전부터 좌익의 염전 공격이 있었기 때문에 사무소 안에는 청원 경찰이 배치되었다. 1950년 7월부터 인민군 치하에 들어갔다가 9·28 서울 수복으로 삼양사가 다시 운영권을 되찾았으나, 이때부터 1년 동안 염전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의 접전이 되풀이되는 장소가 되었으며 이 와중에 132명이 사망하였다.
부산에 피난하였던 김연수는 1951년 2월 차남 김상협[전 고려대학교 총장, 국무총리]을 해리 주재이사로 임명하여 생산과 염전 확장을 지휘하게 하였다. 이때 염전 중앙 수로에 설치한 경비 망루가 지금도 남아 있다. 삼양염업사는 1992년부터 삼양염전을 임대 체제로 전환하였는데, 직영 때는 염전 종업원 수가 400여 명에 달하기도 하였다.
[현황]
삼양염전은 2010년 현재 99만 1735.54㎡가 운영되고 있다. 총 6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으며, 하루 천일염 생산량은 3천 가마 정도이다. 삼양염전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은 색상이 순백색이고 알맹이가 굵으며, 6개월 이상 자연 탈수하여 소금 표면에 있는 마그네슘, 수분, 협잡물 등을 없애 품질이 우수하다. 전라북도는 소금 창고를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