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4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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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敞申在孝古宅 |
영어음역 | Gochang Sin Jaehyo Gota다 |
영어의미역 | House of Sin Jaehyo in Gochang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453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황금희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9년 1월 26일 - 고창 신재효 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제39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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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고창 신재효 고택 국가민속문화재 재지정 |
성격 | 고택 |
양식 | 초가 |
건립시기/일시 | 1899년 |
정면칸수 | 6칸 |
측면칸수 | 2칸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453 |
소유자 | 고창군 |
문화재 지정번호 | 국가민속문화재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에 있는 신재효가 살았던 개항기 가옥.
[개설]
1850년경 동리 신재효(申在孝)[1812~1884]가 거주했던 초가집으로 1979년 1월 23일 국가민속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다. 신재효는 원래 소리꾼이 아니라 재산이 넉넉한 중인 출신이었다. 신재효는 스무 살 무렵 고창 관아의 이방이었는데, 당시 광대라 불리던 소리꾼을 동원해 관청의 행사를 치르면서 판소리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신재효는 선대에서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소리꾼들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했으며 집 안에 노래청을 두어 제자를 길렀다. 신재효는 오랫동안 구전되던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었으며, 동편제와 서편제의 장점을 취해 판소리 이론을 정립했다. 1979년 1월 26일 국가민속문화재 제39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가민속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위치]
고창읍성 입구에 있으며, 대문은 읍성 쪽으로 나 있고, 사립문을 열고 나서면 고창판소리박물관이 나온다.
[변천]
신재효가 여생을 마친 1884년(고종 21)까지 기거한 동리정사(桐里精舎)는 일반적으로 1850년(철종 1), 신재효 생존 당시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건물 상량문에 적힌 ‘광무3년 기해 3월 26일 계유인시(光武3年 己亥 3月 26日 癸酉 寅時)’라는 문기에 의하면, 실제 건립 연대는 1899년(고종 36)이다.
아마도 신재효가 서재로 사용하였던 건물이 퇴락하여 못쓰게 되자 그가 죽은 뒤 1899년에 신재효 생존 당시와 같은 규모로 다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안채를 포함한 여러 건물들이 있었겠지만 현재는 초가만 남아 있다.
[형태]
정면 6칸, 측면 2칸의 일자형 주택으로 북향으로 있다. 평면 구성은 건물의 왼쪽으로부터 부엌 1칸, 온돌방 2칸, 대청 1칸, 2칸통의 온돌방으로 되어 있고, 부엌을 제외한 전면의 5칸은 우물마루로 꾸민 반 칸 너비의 퇴로 연결된다. 구조는 낮은 기단 위에 막돌 덤벙주초를 놓았고, 앞쪽의 기둥은 모두 맷돌 모양의 주초와 두리기둥이며,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운 민도리 3량가(三樑架)이다.
고창 신재효 고택은 부엌 벽을 심벽[心壁: 흙만 가지고 쌓아올린 토언제(土堰堤) 등에서 물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진흙 따위로 만들어 그 심에 넣은 벽체]으로 처리하였고, 부엌과 온돌방 사이에 비교적 넓은 쌍여닫이 출입문을 만든 점과 대청 양쪽 방으로 연결하는 문을 달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고창 신재효 고택 뒤편에는 원래 연못이 있었으나 연못은 메워지고 그 자리에 고창경찰서가 들어서 있었는데, 고창경찰서는 동리박물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이전하였고 지금은 초가만 남아 있다. 건물 왼쪽 뒤편에는 우물이 남아 있다. 1979년에 보수, 정화하고, 1986년에 연못과 담장의 석축을 보수하였다.
[현황]
고창판소리박물관, 군립미술관 등 현대식 건축들 속에 소박한 초가집이 한 채 덩그러니 놓여 있다. 경내가 잘 정비되어 있고 보존 상태가 매우 좋아 실제로 사람이 살았던 집이라기보다는 영화 세트장 같다. 매표소가 있지만 관람료를 받지는 않는다.
[의의와 평가]
고창 신재효 고택은 우리나라 판소리계의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신재효가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서, 그 모습을 인형으로 재현하고 있다. 명인의 옛 집으로서 가치 있는 자료이며, 조선 후기 전라도 지방의 대표적인 민가의 모습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