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4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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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寬洙先生故宅 |
영어음역 | Baek Gwansu Gota다 |
영어의미역 | House of Back Gwan-su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덕산리 44[도덕길 58]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황금희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7년 7월 18일 - 백관수선생고택 전라북도 기념물 제90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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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백관수선생고택 전라북도 기념물 재지정 |
성격 | 생가 |
양식 | 팔작지붕|오진각지붕 |
건립시기/일시 | 조선시대 |
정면칸수 | 4칸 |
측면칸수 | 2칸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덕산리 44[도덕길 58] |
소유자 | 백훈 외 2인 |
문화재 지정번호 | 전라북도 기념물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덕산리에 있는 백관수가 살았던 조선 시대 고택.
[개설]
백관수선생고택은 항일운동의 선구자인 근촌 백관수[1889~?]가 태어난 곳이다. 백관수는 전라도의 유학자 간재 전우에게 한학을 배운 뒤 일본에 건너가 공부하던 중 청년독립단을 구상하고 「2·8독립선언문」을 발표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후 한국민주당을 창단하고 제헌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백관수는 헌법을 제정하는 데 공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6·25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1997년 7월 18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9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현재 건물은 안채, 사랑채, 곳간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일자형 팔작지붕 건물이다. 부엌 옆으로 2칸의 방이 있고, 옆으로 건넌방이 있으며, 그 앞에 마루방이 있는 구조이다. 남부 지방의 민가들은 보통 부엌, 방, 대청, 건넌방 순으로 구성되지만, 백관수선생고택은 방의 수를 늘려 겹집과 같이 건넌방 앞면에 마루방을 만든 것이 독특하다.
방 앞에는 툇마루가 있고, 마루방과 건넌방 주위에도 쪽마루를 두어 각 방을 연결하고 있으며, 마루방은 사방에 문을 내어 각 공간과 직접 통하도록 하였다. 남향을 한 안채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우진각지붕의 56㎡ 규모의 일자형 주택이다. 자연석 주춧돌 위에 네모기둥을 세웠다.
사랑채 서쪽에 3칸짜리 17㎡ 크기의 곳간이 처마가 맞닿게 지어져 있다. 칸실의 구성을 보면, 동쪽에서부터 대문간과 사랑대청이 앞뒤로 배치되었고, 그 옆에는 2칸의 방이 있는데, 앞뒤로 모두 툇마루를 시설하였다. 사랑대청은 툇마루보다 바닥을 10㎝ 정도 높게 하여 공간을 구획하였다. 이어서 부엌과 방이 겹집과 같이 두 줄로 배치되어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조선 후기에 자영농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공간를 확대하면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이는 채가 분화되는 것보다 경제적이면서 보다 쉽게 넓은 공간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채 북서쪽으로 백관수 기념석이 설치되어 있고, 북쪽 야산에는 최근 지은 백관수 사당이 있다.
[현황]
본래 초가였으나 새마을사업 당시 시멘트 기와로 지붕을 개수하였다. 부엌 역시 입식 부엌으로 개조되었다. 이때 부엌 한쪽에 욕실을 만들었고, 집 뒤 처마 밑에는 보일러실을 냈다. 훗날 다시 초가로 복원하였다.
[의의와 평가]
백관수선생고택은 대문채와 사랑채를 한 동으로 처리하며 공간을 나누어 각 채의 평면 형태에서 당시 건축의 일반적인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사랑채 공간 구성과 앞면의 조망을 고려한 사랑마루와 마당의 구성 등이 소박한 민가로서, 선비의 기품을 느낄 수 있는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