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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암리의 말바위와 되바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1657
한자 九岩里-
영어음역 Guamn-riui Malbawiwa Doebawi
영어의미역 Malbawi Rock and Doebawi Rock of Guam-ri
이칭/별칭 「말[斗]바우와 되[升]바우」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마래마을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손앵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설화|암석 유래담
주요 등장인물 최씨 성을 가진 장수
관련지명 공음면 구암리 마래마을|말바위|되바위
모티프 유형 만리장성에 쓰이지 못한 바위|한 말과 한 되 분량의 구멍이 파인 바위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마래마을에서 말바위되바위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구암리의 말바위와 되바위」는 중국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축성할 때 최가라는 성을 가진 장수가 바위를 모으다가 성이 완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쓸모없게 된 바위들을 구암리 마래마을에 폐기하였는데, 그 바위에는 각각 한 말과 한 되 분량을 가늠하기 위해 파 놓은 부분이 있어서 이를 말바위, 되바위로 부르게 되었다는 암석 유래담이다. 말바위, 되바위가 만들어진 연대는 백제 초기, 즉 중국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축성할 때라고 하는데, 이 두 시기 사이에는 200년 이상의 간격이 있다. 이는 시대를 막연히 표기하는 구비문학의 특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채록/수집상황]

1992년 고창군지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고창군지』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공음면 구암리 마래마을 남쪽에 장수굴과 관바위가 위치하고 있다. 장수굴은 약 15명 정도가 거주할 수 있는 굴이고, 관바위는 도사암이라고도 부른다.

백제 초기에 중국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축성할 때 최가라는 성을 가진 장수에게 바위를 수집하여 오라는 명을 하였다. 명을 받은 장수는 현 영광군 홍농면 덕림산에서 바위를 수집하여 말에 싣고 가다가 축성 작업이 완료됐다는 소식을 듣고 바위가 쓸모없게 되자 폐기한 곳이 바로 마래마을이다. 그 장수는 산의 지리를 보고 민가는 없지만 산수가 다른 산에 비해 범상치 않으므로 폐기한 바위 밑에 굴을 파고 살면서 그 주위에 바위를 괴어 놓았는데, 이 바위 중에 말바위되바위가 있다.

최가라는 장수는 힘도 세지만 지혜가 있어 분량을 가늠하기 위해 바위 위에 구멍을 파 놓았는데, 지금도 말바위는 1말이 들어가고 되바위는 1되가 들어간다. 말바위는 네 귀가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키기 때문에 지사들이 나침반에 고장이 나면 이 말바위의 네 귀를 통해서 남북의 방향을 맞추기도 한다는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마래마을 주민들은 말과 되를 그 바위에 준하여 사용하였다고 하며, 그 장수는 장수굴에서 약 10년 간 살다가 떠나면서 그 주위의 바위를 다시 괴어 놓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말바위되바위는 일상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용량의 척도가 되기도 하고 방위의 기준이 되기도 하여 이름 그대로 우리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바위이다.

[모티프 분석]

「구암리의 말바위와 되바위」의 주요 모티프는 ‘만리장성에 쓰이지 못한 바위’, ‘한 말과 한 되 분량의 구멍이 파인 바위’ 등이다. 만리장성은 비록 중국의 성이지만 워낙 규모가 크고 장기간에 걸친 역사(役事)였기에 우리나라에도 축성 설화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또한 만리장성 축성의 힘든 부역을 피하려고 마한으로 도망하여 중국 백성이 많아지자 한쪽 땅을 주어서 살게 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진시황은 만리장성이라는 무리한 역사를 벌이기는 했으나 도량형을 통일한 업적이 크다. 말바위되바위가 일상생활에 필요한 용량의 척도이자 방위의 기준이 되었다는 내용으로 미루어보건대 「구암리의 말바위와 되바위」 이야기는 당시 진시황의 사적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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