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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등산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801734
한자 方等山歌
영어음역 Bangdeungsanga
영어의미역 Song of Bangdeungsan Mountain
이칭/별칭 반등산곡(半登山曲),방등산(方等山)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전라북도 고창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김정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대 시가
작가 장일현

[정의]

백제시대에 고창 방장산을 배경으로 쓰인 고대 시가.

[개설]

방장산고창읍 동쪽에 있는 산이다. 전라북도 고창군과 정읍시, 전라남도 장성군의 경계에 있으며, 양고살재에서 벽오봉[방문산], 고창고개, 봉수대, 써래봉을 거쳐 갈재로 이어진다. 백제 시대 이후 방등산, 또는 반등산이라 하다가,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 인조 때 청나라에 멸망한 명나라를 숭상하던 선비들이 중국의 삼신산과 방장산이 비슷하다 하여 방등산이라고도 불러오고 있다. 고창군의 진산 방장산은 정읍시 고부의 두승산, 부안군의 변산과 더불어 전라북도의 삼신산이라 하며, 지리산, 무등산과 더불어 전라도의 삼신산이라고도 한다.

방등산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고려사(高麗史)』 권71 삼국속악조(三國俗樂條)에 방등산(方等山)으로 명기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반등산(半登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방등이란 불가의 용어로서, 방정하고 평등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반등산이란 이름은 태산이 높고 장엄하여 산을 절반밖에 오를 수 없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사』 악지에 기록된 방등산은 나주시 진관의 속현인 장성, 고창 경계에 있어, 신라 후기에 도적이 반등산에 근거지를 두고 있으면서 양가집 자녀들을 많이 잡아다 부렸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원하러 온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고창 방장산의 수려한 산세를 보고 큰 인물이 나올 것을 경계하여 쇠말뚝 다섯 개를 박아 산의 정기를 차단하려 했으며, 일제 강점기 때도 쇠말뚝을 박았다 하여 제거 작업을 벌였다.

방장산에 있는 양고살재는 병자호란 때 고창 출신 박의(朴義) 장군이 누루하치의 사위인 적장 양고리(陽古利)를 살해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박의는 1599년(선조 32) 고수면 초내리 산양동에서 고창 입향조인 관찰사 양오공의 증손으로 태어났다. 용기가 대단하고 말을 잘 타며 총을 잘 쏘아 박포수라 불렀다. 1642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하였다.

병자호란 때 전라도 병마절도사 김준용이 근위병을 거느리고 수원 근교 광교산에서 적을 만나 싸워 여러 번 이기기는 하였으나, 갑자기 내린 폭설 속에서 양쪽 병사들이 격전을 벌인 끝에 아군이 패하게 되었다. 박의는 적군의 이동로인 방장산 입구에 매복하여 있다가 적이 나타나자 적의 대장을 총탄으로 쏘아 죽였다. 죽은 적의 상장인 양고리는 만주 정황기인으로 누루하치의 사위이며 창평전투에서 58회나 승리하여 청태종에 총애를 받던 명장이었으나, 예친왕 다락을 따라왔다 박의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청태종은 양고리의 죽음 소식을 듣고 크게 통곡하였다고 전하며, 무훈왕에 봉하였다고 한다. 양고리가 죽은 뒤에 산으로 급하게 피하는 자를 보고 청군이 저 사람이 양부마를 쏜 사람이라 하니, 활을 잘 쏘는 애륵을 시켜 박의를 잡아 목을 베었다고 한다. 박의의 묘소는 고수면 예지리 양정마을에 있으며, 박의의 후손들은 고수면 장두리아산면 중월리 등에 살고 있다. 방장산은 호남고속도로와 서해안고속도로 개통으로 접근이 쉬워짐에 따라 산악인들에게 새로운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내용]

「방등산가(方等山歌)」방등산[방장산]에 있는 도적 떼에 의해 장일현이라는 여자가 납치되자 남편이 구해주러 오지 않는다고 원망하면서 불렀다는 노랫말인데, 현재 가사는 전해오지 않는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106 악고(樂考) 17에는 「반등산곡(半登山曲)」으로 나와 있지만 두 작품의 내력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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