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7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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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敞水利組合 |
영어음역 | Gochang Suri Johap |
영어의미역 | Gochang Irrigation Associ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광서 |
성격 | 수리 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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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연도/일시 | 1916년 고부수리조합 설립|1939년 고창수리조합으로 발전 |
설립자 | 천야장구 |
[정의]
일제 강점기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에 있었던 수리 조합.
[개설]
수리조합은 1906년 대한제국 탁지부가 제정한 수리조합조례와 1908년에 공포된 수리조합설치요강 및 모범규약에 따라 설치되기 시작했으며 일제강점기 농민 수탈의 대명사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는 농민을 위한 조합으로의 성장과 동시에 다수 농민을 대상으로 하는 자주적인 운영 체제로 전환했다. 1960년대 초의 토지개량조합으로 명칭 변경하였다. 이어 1970년에는 농촌근대화촉진법을 계기로 농지개량조합으로 개칭되면서 농업 근대화 기반 구축의 주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농지개량조합의 주 임무는 농업용수 확보와 공급, 수리 시설물 설치·개보수·유지 관리 및 경지 정리 등 대단위 농업 생산 기반 정비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1990년대 하반기에는 전국적으로 93만여 명의 농민 조합원과 5,050㎢에 달하는 면적의 논을 관리하게 되었다.
한편 전라북도 내 농지개량조합은 1980년 이후의 활발한 농민운동과 수세에 대한 농민들의 집단 반발에 부딪혀 기반 자체가 흔들리면서 농업기반공사로 통폐합되었다. 당시 전라북도에는 전국 최대 규모의 동진농지개량조합과 전국 최고의 전북농지개량조합을 비롯하여 금강, 전주, 남원, 고창, 정읍, 순창 등 8개 조합에 2,900여 개의 흥농계가 있었으며 한해 예산만 366억 원에 이르렀다. 통폐합 당시 조합별 자립도는 전북농지개량조합이 66%로 도내 최고를 기록하고 있었고, 다음으로 전주농지개량조합[62%], 정읍농지개량조합[58%], 금강농지개량조합[41%], 고창농지개량조합[40%], 순창농지개량조합[39%], 동진농지개량조합[39%] 등의 순이었다.
[설립목적]
고창 지역 내 토지 소유자 또는 토지 가옥 소유자가 모여 농지에 대한 관개용 저수지나 제방 등의 축조·관리 및 수해 예방 사업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변천]
고창수리조합은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에 저수지를 축조하면서 1916년 일본인 초대 조합장 천야장구(川野長久)가 주도하여 현재의 고창군 흥덕면과 정읍시 고부면을 아우른 지역에 물을 공급하는 고부수리조합이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고부수리조합은 1939년 수리조합 창립을 위한 기성회가 결성되면서 고창수리조합으로 발전하였다. 이후 고창수리조합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조합의 명칭 변경과 더불어 현재에는 한국농어촌공사 전북본부 고창지사로 이어지고 있다.
[주요사업과 업무]
수리조합의 주요 사업은 시대적으로 그 내용이 다양하고도 광범위하게 변해왔다. 초창기 수리조합은 우리나라의 농업 경영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수리조합을 통한 토지 개량 사업은 대규모의 저수지와 관개 수로를 건설하여 농업용수를 멀리 떨어진 농토까지 안정적으로 보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천수답 시대를 탈피하고 수리 안전답 시대로 전환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여기에 비료 사용 증가와 함께 쌀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증가시켰다.
그러나 수리조합을 통한 토지 개량 사업은 일제가 당시의 쌀 증산 시책을 위해 강제로 밀어붙인 정책의 하나였다. 초창기 수리조합은 살인적 수세 징수로 농민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줘 수세를 거부하는 농민운동과 소작 쟁의를 불러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일제의 쌀 수탈 정책은 1920년에 이르러 산미 증식 계획으로 구체화되었다. 산미 증식 계획은 크게 농사 개량 사업과 토지 개량 사업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추진되었고 일제가 역점을 둔 것은 수리조합을 통한 토지 개량 사업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논농사는 강우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관개 개선 중심의 토지 개량 사업이 수반되지 않는 한 일제가 의도하는 쌀 증산은 물론, 비료 사용 등 농사 개량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따라서 일제는 토지 개량 사업에 가장 중점을 두었고 이를 위해 각 지역에 수리조합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효과적으로 사업을 추진해 나가고자 하였다. 그 결과 일제강점기에 수리조합이 급증하여 전국에 130여 개소가 설치되었고 토지 개량 사업지의 총 수확량 가운데 95%가 수리조합 지역에서 산출되었다.
결국 수리조합의 주요 사업은 수리조합을 운영하는 일제와 소수의 대지주들을 중심으로 일방적으로 추진된 것으로 농민층의 광범한 몰락과 파탄을 가져왔다. 따라서 각 지역에서는 수리조합의 사업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광범한 항쟁이 전개되었고 이로 인해 수리조합 사업은 결국 커다란 차질을 빚게 되고 일제의 산미 증식 계획도 1934년에 중단되었다. 그러나 이 기간 중 일본인과 조선인 대지주는 수리조합의 주요 사업을 통해 토지 겸병을 촉진해 나간 반면, 중·소지주 이하 농민층들은 대부분 몰락, 파탄의 길을 걸어 절대 빈곤의 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농민 수탈의 대명사였던 수리조합은 해방 이후 농민을 위한 조합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대체로 1960년까지 수리조합의 주요 사업 내용은 천수답이나 수리 불안전답에 대한 관개 개선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에 접어들면서 토지 개량 사업, 개간촉진법, 공유수면매립법 등이 정비되면서 토지개량조합으로 개칭되었으며 이후부터 그 사업 내용도 종래의 수리 시설은 물론 개간, 경지 정리 및 농지 개량 시설의 유지·관리와 개·보수 등을 망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