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B0204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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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 송현리 안현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명철 |
[질마재, 질마재, 시인의 고향 질마재]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에 있는 미당시문학관을 둘러봤으면, 이제 질마재로 가 볼 일이다. 질마재 정상까지는 시문학관에서 2.2㎞ 정도. 질마재로 가려면 마을 앞으로 난 큰 도로를 따라가지 말고, 마을 안길로 들어가 기웃기웃 고샅길 너머로 살림집들을 구경하면서 가는 게 좋다.
마을 안길을 따라 질마재로 가다 보면, 미당이 1924년 줄포공립보통학교[현 줄포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한학을 공부했던 서당마을을 지난다. 두 그루의 팽나무가 지켜 주고 있는 모정에 걸터앉아 잠시 쉬었다 갈 수도 있다.
그곳에서부터 질마재로 가는 길은 호젓한 오솔길이다. 조금 더 걸어가면 콘크리트를 덧씌우지 않은 흙길도 걸을 수 있다. 고슬고슬한 햇살을 받으면서 말랑말랑한 흙을 밟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길도 없을 것이다.
질마재는 야트막한 고갯길이다. 입구에서 정상까지의 거리는 1㎞쯤. 진마마을 사람들이 해산물이나 소금등짐을 지고 넘던 고개이다. 마을 사람들은 소금이나 해산물 등을 질마재 너머 장터로 가지고 나가 곡식으로 바꿔 돌아왔다. 도회지로 나간 아들네와 딸네들 집에 갔다 올 때도 질마재를 넘어와야 했다. 진마마을 구멍가게에서 만난 할머니는 “밤에는 산신령이 불을 환하게 켜 줘서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고 말했다.
질마재 고개에 오르면 진마마을과 송현리 안현마을[고창안현돋음볕 체험마을]이 그대로 내려다보인다. 행정구역상 선운리와 송현리로 나뉘어 있지만, 두 마을이 이렇게 하나로 보일 때 비로소 온전한 ‘시인의 마을’이 된다.
해가 저물자 바다 너머로 변산반도의 첩첩 산들이 아슴아슴해진다. 변산 발아래 왼쪽엔 모항, 가운데엔 곰소항이 웅크리고 있고, 오른쪽 움푹 들어간 곳엔 줄포항이 있다. 시인의 마을과 곰소 사이에는 석양에 붉게 물든 곰소만 바다가 누워 있다.
질마는 소나 말의 안장을 뜻하는 ‘길마’의 사투리이다. 그러니까 질마재는 ‘안장을 닮은 고개’이다. 진마마을도 ‘질마재’에서 비롯된 이름일 것이다. ‘길마재’라는 이름은 전국에 수없이 많다. 고개라는 게 언뜻 보면 양쪽 언덕 사이에 걸려 있는 안장 같은 생김새가 아닌가. 서울 무악재도 한때 ‘길마재’라고 불렸다. 하지만 이제 질마재는 고창 지역만의 전유물이 됐다. 이래서 시인이 위대한 것이다. 이쯤에서 미당의 시 「질마재의 노래」를 한 번 읊조려 보자.
세상일 고단해서 지칠 때마다/ 댓잎으로 말아 부는 피리 소리로/ 앳되고도 싱싱히는 나를 부르는/ 질마재. 질마재. 고향 질마재.
소나무에 바람소리 바로 그대로/ 한숨 쉬다 돌아가신 할머님 마을/ 지붕 우에 바가지꽃 그 하얀 웃음/ 나를 부르네. 나를 부르네.
[국화향 진하게 풍기는 안현마을]
진마마을 구멍가게에서 버스승강장 쪽으로 가서 주차장을 지나 송현교를 건너면 안현마을, 곧 고창안현돋음볕 체험마을이 나온다. 송현교에서 선운저수지 쪽으로 하천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갖가지 모양의 장승들이 들고 서 있는 미당의 시를 감상할 수 있다. 늦가을 그 길은 갈대와 국화, 그리고 시와 장승이 어울려 서정적인 풍경을 만들어 낸다. 천천히 걸으면서 미당의 시를 읽다 보면 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4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안현마을 역시 시인의 마을이다. 마을 뒷산 등성이에 2000년 12월 24일 서울에서 작고한 미당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진마마을이 그가 태어나[1915년 5월 18일]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을이라면, 안현마을은 그가 죽어 영원히 살아갈 마을인 것이다.
그의 호 미당(未堂)은 ‘미완성의 집’을 뜻한다. 미당은 아홉 살[우리 나이로 열 살]에 고향을 떠나 인생의 팔 할을 바람처럼 떠돌이로 살았다. 그리고 바람 잘 날 없던 85년 생애를 접고 마침내 고향에 돌아와 누웠다. 그 작은 무덤이 그가 죽어서 완성한 집인 셈이다. 늦가을에는 그의 묘소 주변 3만 5000㎡에 국화꽃이 만발한다.
안현마을에서는 사실사철 국화꽃이 핀다. 국화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어 시들지 않기 때문이다. 고샅길 담벽에도 국화가 만발해 있고, 심지어 지붕에도 국화가 피어난다.
[거울 앞에 선 누이들을 기리는 벽화 마을]
고창안현돋음볕 체험마을을 알리는 표지판을 지나 마을회관 쪽으로 접어들면, 어느 집 담벽에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로 시작되는 미당의 대표작 「국화 옆에서」가 적혀 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이 같은” 모습의 얼굴들도 국화꽃 만발한 담벼락에 물들어 있다.
이 벽화에 그려진 인물들은 실제 안현마을에서 동네 길흉사를 챙기며 살고 있는 주민들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큰누님 김순애 씨와 작은누님 양옥순 씨만 그려졌지만, 뒤이어 오균열ㆍ문영애 부부, 박향순 씨, 한봉자 씨의 얼굴이 더 그려져 모두 6명이 벽화에 담겨 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 국화와 누이의 그림들은 동네를 휘감아 돌며 1㎞나 계속된다. 마을 전체가 거대한 갤러리다. 그리고 마을 뒤편 모정과 돋음볕체험관을 지나 산자락을 살짝 오르면 뒷동산 중턱에 조용히 몸을 누인 시인이 들판 건너 자신이 태어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안현마을은 2006년 12월에 농림부로부터 녹색체험마을로 선정되면서 본격적인 체험 마을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곳의 벽화들은 송주철 공공디자인연구소에서 작업을 맡아, 10여 명의 벽화 전문 화가들이 함께 그렸다. 녹색 체험 마을 컨설팅을 맡은 송주철 공공디자인연구소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어떤 테마가 좋을지 고민한 끝에 미당의 시 「국화 옆에서」를 소재로 해서 마을 전체를 꾸미기로 결정했고, 담장 보수에서 시작해 국화, 시, 주민 얼굴 등 밑그림을 그린 후 채색까지 꼬박 6개월 정도가 걸려 2007년 3월에 벽화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솟아오르는 햇볕’이란 뜻의 ‘돋음볕마을’이란 예쁜 마을 이름까지 새로 붙였다.
안현마을, 곧 고창안현돋음볕 체험마을에서는 담장과 지붕에 그려진 벽화를 보면서 고샅길을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게다가 집 안 여기저기며 고샅길 여기저기에 심어 놓은 국화가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는 늦가을에는 그 정취에 푹 젖어들 수밖에 없다. 안현마을 이장 국지호[1958년생] 씨에 의하면, 이 외에도 곰소만의 염전과 갯벌에서 각종 체험을 즐길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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