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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491
한자 仁祖-公州播遷
영어의미역 Yi Gwal's Rebell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유승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반란
발생(시작)연도/일시 1624년 2월 12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624년 2월 22일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평안도 영변
관련인물/단체 이괄(李适)[1587~1624]|인조(仁祖)[재위 1623~1649]|장만(張晩)[1566~1629]|이원익(李元翼)[1547~1634]|기자헌(奇自獻)[1562~1624]|이수백(李守白)|기익헌(奇益獻)|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1576~1636]|장유(張維)[1587~1638]|김반(金槃)[1580~1640]|강윤형(姜允亨)[1600~1678]|민여검(閔汝儉)|이귀(李貴)|서인(西人)

[정의]

1624년(인조 2) 2월 이괄의 난으로 한양이 함락됨에 인조가 공주에 잠시 피난한 일.

[역사적 배경]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광해군은 국방의 강화와 중립적 외교 정책 등 민생과 대외 정치에 있어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대내 정치에 있어서는 대북파의 권력 독점을 허용함으로써 다른 정치 세력들을 소외시켰고, 무엇보다도 인목대비를 폐비시킴으로써 효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조선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된다. 인목대비 폐비 사건은 광해군 집권 이후 정치권에서 배제된 서인(西人)들에게 좋은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서인은 마침내 명(明)에 대한 배은망덕과 인목대비 폐비의 반인륜성을 대의명분으로 삼아 1623년(광해군 15) 김류(金瑬), 김자점(金自點),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을 앞세워 무력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綾陽君)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이 사건을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한다.

인조 등극 이후 논공행상에서 이괄은 인조반정에 공이 많았는데도 반정 계획에 늦게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2등 공신에 책봉되어 한성부윤에 임명되었다. 이에 불만을 느끼던 중 관서(關西)지방에 여진족이 침입할 염려가 있다하여 이괄을 다시 도원수 장만(張晩) 휘하의 부원수겸평안병사로 좌천시켜 평안도 영변에 머무르게 하니, 이괄의 불만이 더욱 커져 마침내 반란을 꾀하기에 이르렀다.

[경과]

1624년 1월 24일 이괄은 자신의 부하장수 이수백(李守白), 기익헌(奇益獻) 및 구성부사인 한명련(韓明璉)과 함께 가까운 병영의 군사 1만여 명과 항왜병(降倭兵) 100여 명으로 평안도 영변을 출발하여 먼저 개천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을 도체찰사로 삼아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는 한편, 반란군과 내응할 것을 염려하여 전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등을 처형하였다.

이괄의 군대는 장만, 이수일 등이 이끄는 관군을 연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남하, 불과 보름 만에 한양 근교인 벽제관까지 육박해 들어 왔다. 이처럼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조정에서는 2월 8일에 인조가 공주(公州)로 피난 가는 일을 논의하여 남행을 결정하였으며 2월 12일에는 공주행재소에서 정시를 실시하여 6인을 합격시켰다. 2월 16일 공주에 당도하여 공산성 쌍수정에 머물다가 난이 진압된 2월 22일에 한양에 돌아가게 되었다.

공주가 파천지로 정해진 것은 대사간 장유(張維)의 의견에 의한 것이었다. 원래 조신들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주장하여 의견이 대립해 있었는데, 장유는 “공산성은 앞에 강이 흐르고 있어 형세가 대단히 좋을 뿐 아니라 길 또한 멀지 않으니, 우선 공산성에 들어가 정세를 관망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결국 인조의 선택에 의해 공주가 파천지로 결정되었다.

[결과]

조정이 공주로 파천한 뒤 한양에 입성한 이괄은 1624년 2월 11일 선조의 열 번째 아들 흥안군 이제(李瑅)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바로 그날 밤 장만(張晩)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이괄의 반란군을 한양 근교 안령(鞍嶺)에서 대파하였다. 이괄은 패잔병을 이끌고 광희문을 빠져나와 경기도 이천으로 달아났으나, 전부대장(前部大將) 정충신(鄭忠臣)의 맹렬한 추격을 받게 되었다. 이에 이괄의 부하 기익헌, 이수백 등은 자신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이괄, 한명련 등 9명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함으로써 반란이 평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괄의 난은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런 과정에서 공주 출신의 인물이 많은 활약을 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김장생의 아들 김반(金槃)인조를 호종(扈從)했으며, 이괄의 기세를 꺾은 안현(鞍峴) 전투에서 공을 세운 민여검(閔汝儉)은 공주 유성 출신이었다. 또 인조반정에 공훈을 세워 정사일등공신에 책봉되고 공주로의 파천 시 호위대장으로 인조를 곁에서 따른 이귀(李貴)도 공주 사람이었다.

이괄의 난이 평정된 후에도 인조는 곧 환도하지 않고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협력의 공이 많았던 호서 및 호남 지역에 대하여 몇 가지 포상의 조치를 취하였다. 우선 호서 및 호남 지역 백성들에 대해서 당분간 군역을 감하는 한편, 왕이 파천하면서 지나온 여러 고을의 주민들에 대해서는 향후 3년간 대동미 1두씩을 감하여 주었다. 단 공주에 대해서만은 특별히 2두를 감하여 주었다.

또한, 응시 자격을 호남 및 호서 지역에 한하는 과거시험을 특별히 개최하였는데, 급제한 다섯 명을 뽑고 보니 그 중에서 공주 사람이 한 명도 들지 못하였고, 다만 강윤형이 여섯 번째 순위에 올라 있었다. 이에 왕은 강윤형(姜允亨)에게 특별히 급제를 내렸으니, 이는 공주가 왕이 머문 곳이라는 것에 대한 특혜 조치였다.

인조는 공주에 머문 지 대략 열흘 만에 한양으로 돌아갔다. 이괄의 난은 불과 수십 일 만에 평정되었으나, 반란에 의해 국왕이 수도를 버리고 파천한 것은 조선왕조에서는 이괄의 난이 유일한 예가 되었다. 인조가 머물었던 공주 공산성 내 전각 앞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있어 공주 공산성 쌍수정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이 후 1708년(숙종 34)에 건립된 공주 공산성 쌍수정 사적비에는 이괄의 반란과 인조의 파천에 대한 내력 및 공주 공산성 쌍수정에 머물렀던 10일 동안의 행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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