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04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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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時代 |
영어음역 | Joseon Sidae |
영어의미역 | Joseon Period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해준 |
[정의]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조선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충청남도 공주 지역의 역사.
[연혁 및 행정구역]
조선시대에 공주는 지방 행정의 중심지인 감영의 소재지이자 관찰사가 위치하는 행정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충청도는 고려 말 1356년(공민왕 5) 양광도를 개칭한 것으로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행정구역의 조정이 이루어져 태종 때에 대체로 그 윤곽이 정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공주는 충청도의 4목(공주·청주·충주·홍주) 가운데 하나로 정3품직인 목사가 파견되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공주는 목으로서의 위치를 견지하면서 임진왜란 이후에는 감영 소재지로서 호서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즉, 1598년(선조 31)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됨으로써 공주는 충청도 수부가 되었다. 감영의 공주 이전에 따라 충청도의 명칭은 공충도(公忠道)·공홍도(公洪道)·공청도(公淸道)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공주목은 인조 대와 1670년(현종 11)부터 1679년(숙종 5)까지, 1778년(정조 2)부터 1787년(정조 11)까지 일시적으로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공주의 관할구역은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와는 달리 비교적 정확한 기록들을 남기고 있다. 우선 면리편제의 실상이 기록으로 남아 있고 인구나 마을 이름들도 추적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의 기록 자료로서 주목 되는 것은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1759)와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이다. 특히, 『여지도서』는 18세기 후반의 공주목 각 면리의 명칭, 호수와 남녀 인구수를 기록하고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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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조선 후기 공주목의 면리편제와 호구수 변천
『여지도서』와 『호구총수』의 편찬 연대차인 30여 년간 마을 수가 급증된 현상을 볼 수 있다. 『여지도서』에 나타난 207개 마을이 『호구총수』에서는 864개로 급증된 것이다. 이는 특별한 행정편제의 변화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마을을 파악하는 수준의 차이, 혹은 마을의 분화 현상을 보여준다.
1859년의 『공산지(公山誌)』는 『여지도서』의 면리편제를 그대로 옮겨 기록하고 변화된 호구수만 기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공주목의 행정구역은 현재의 대덕군 및 대전시를 위시하여 연기군과 부여군의 일부를 포함하는 동서 200리, 남북 100여 리의 넓은 지역이었다.
[정치와 군사]
조선시대의 군사체제는 크게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눌 수 있다. 지방의 군사제도는 세조 때에 개편·정비된 진관체제(鎭管體制)를 바탕으로 짜여 있다. 진관체제란 지방의 주요 지역에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진을 거진 중심으로 편성한 것이다. 진관체제는 행정조직을 군사조직으로 활용한 것으로 여러 진은 평시에는 주진(主鎭)의 관할 하에 있었지만,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각 진관이 독자적으로 군사 행동을 취할 수 있게 하였다.
진관체제가 수립됨에 따라 공주목사는 종3품의 무반직인 첨절제사(僉節制使)를 겸하였다. 이에 공주진관 내에는 인접의 군현들이 군사동원체계상 공주의 예하에 들어 있었다. 군(郡)으로는 임천군, 한산군 등 2군이 있었고, 현(縣)으로는 전의현·정산현·은진현·회덕현·진잠현·연산현·니산현·부여현·석성현·연기현 등 10현이 있었다.
당시의 홍주목에는 태안군·서천군·서산군·면천군·온양군과 홍산현·평택현·청양현·비인현·남포현·결성현·덕산현·대흥현·보령현·해미현·당진현·신창현·예산현·아산현 등 모두 5개 군 14개 현이 관할로 되어 현재의 충청남도 지역은 크게 공주목과 홍주목의 관할지로 분할되어 있었다.
각 진의 지휘관은 중앙에서 별도로 파견되는 것은 아니고, 해당 지방의 수령이 겸하도록 되어 있었다. 공주 진영의 첨절제사는 공주목사가, 임천과 한산의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는 해당 군수가, 기타 여러 진의 절제도위(節制都尉)는 각 현감(縣監)이 겸직하였다.
[경제와 사회]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조선 초기 공주에 관련된 여러 정보를 관원·연혁·명산대천·사방 경계·호구·군정·성씨·풍속·간전(墾田)·토의(土宜)·토공(土貢)·자기소·도기소·성·온천·누정·역(驛)·봉화·관할 군현 등의 항목으로 전하고 있다. 공주의 호구는 2,000여 호, 10,000여 명이었으며, 군정은 시위군 78명, 진군 203명, 선군 699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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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조선 초기 공주의 경제 상황
이 밖에도 공주는 기름진 땅이 적고 메마른 땅이 많으며, 남자는 쟁(箏)·저[笛]를 좋아하고, 여자는 노래와 춤을 좋아한다고 전하고 있다. 또 토의는 오곡과 닥나무·왕골·밤나무·뽕나무 등이며, 토공은 자리·종이·꿀·밀[黃蠟]·칠·잣·감·대추·호도·잡깃[雜羽]·느타리·여우 가죽·살쾡이 가죽이다. 약재로는 산골[自然銅]·인삼·조피나무 열매[川椒] 등을 생산하였다.
현재 공주시의 영역은 조선시대의 공주목의 영역보다 훨씬 줄어든 상태다. 즉, 유성(儒城)은 현재 대전광역시에 속해 있으며, 또한 일부는 현재 연기군, 예산군 등에 속하게 되는 등 큰 변화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사료는 이런 점에 유의하여 볼 필요가 있다.
성씨로는 공주를 비롯하여 속현인 신풍(新豊)·유성·덕진(德津)과 완부부곡(薍釜部曲)·귀지부곡(貴知部曲)·육역(六驛)·유구역(維鳩驛) 등 공주에 귀속된 군현들의 성씨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본주(本州)에는 토성으로 이(李)·정(鄭)·송(宋)·박(朴)·황(黃)·고(高)·임(任), 외촌성(外村姓)으로 황(黃)·백(白)·하(河), 당투화성(唐投化姓)으로 김(金)이 기록되어 있다. 신풍(新豊)에는 토성으로 백(白)·박(朴), 망성(亡姓)으로 최(崔)·신(申), 촌성(村姓)으로 현(玄)이 기록되어 있다.
유성(儒城)에는 토성으로 임(任)·주(朱), 망성(亡姓)으로 이(李)·전(田)·유(兪)·미(米)가 기록되어 있다. 덕진(德津)에는 현(玄)·고(高), 망성(亡姓)으로 서(徐)·진(陳)·오(吳)가 기록되어 있다. 완부부곡(薍釜部曲)과 귀지부곡(貴知部曲)에는 유(兪)가 기록되어 있다. 육역(六驛)에는 현(玄), 유구역(維鳩驛)에는 최(崔)가 기록되어 있다.
위의 기록에서 본주의 성씨로 기록된 이들은 대부분 공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일 것이다. 현재 공주(또는 공산)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공산안씨(公山安氏), 공산정씨(公山鄭氏), 공주김씨(公州金氏), 공주박씨(公州朴氏), 공주이씨(公州李氏) 등이 있다.
[교통과 통신]
조선시대에는 육상 운송을 위한 역(驛)·원(院)과 해운·수운을 위한 조운제가 시행되었으며, 통신을 위한 봉수제(烽燧制)도 실시되었다.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는 주요 도로에는 대략 30리마다 역을 두고 말을 제공하고 그 밖에 진상 등의 관물 수송까지도 담당하였다. 역에는 역장(驛長)·역리(驛吏)·역졸(驛卒)들을 두고 관리하였으며, 여러 개의 역을 하나로 편성하여 찰방(察訪) 또는 역승(驛丞)이 이를 관장하는 동시에 각종 정보를 수집·보고하기도 하였다.
공주에는 여러 역이 설치되어 있었다. 기록에 나타나는 공주 지역의 역으로는 일신역(신관동)·관정역(정안면 광정리)·경천역(정안면 경천리)·단평역(우성면 단지리)·유구역(유구면 석남리)·이인역(이인면 이인리)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이인역에는 이인도의 역승(후기에는 찰방)이 주재하여 용전·은산(부여현)·유양(정산현)·숙홍(홍산현)·남전(남포현)·청북(비인현)·두곡(서천군)·신곡(한산군)·영유(임천군) 등의 여러 역을 관할하였고, 다른 역들은 성환도 찰방의 지휘를 받았다.
봉수제도는 변방의 다급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 설치되었다. 봉수대는 수십 리마다 눈에 잘 띄는 산꼭대기에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신호를 보냈다. 평상시에는 횃불 1개, 적이 나타나면 횃불 2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횃불 3개, 적이 국경을 침범하면 횃불 4개, 전투가 벌어지면 횃불 5개로 각각 신호하였다.
봉수의 간선은 직봉(直烽)이라 하여 기점을 동북은 경흥, 동남은 동래, 서북의 내륙 지방은 강계, 해안 지방은 의주, 서남은 순천으로 하고, 종착점을 서울 목멱산(木覓山)[남산]으로 하였다. 이 밖에 전선의 초소로부터 직봉선의 사이사이에 중간 역할을 하거나 전선에서 직접 본진이나 본읍에 이르는 단거리의 간봉(間烽)이 있었다.
공주의 경우에는 전라도의 남해안과 서해안(순천·강진·진도·해남 등)에서 올라오는 봉수가 이곳을 경유하여 서울에 이르도록 되어 있었다. 남해안과 서해안의 봉수는 주로 왜구에 대비한 통신 수단이었다. 공주에서는 신기동의 월성산 봉수가 노성 조성산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정안면 북계리에 있는 고등산 봉수로 연결되고, 다시 쌍령 봉수를 거쳐 천안 대학산으로 연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