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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청년수양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988
한자 公州靑年修養會
영어음역 Gongju Cheongnyeon Suyanghoe
영어의미역 Gongju Youth Character-building Friends Societ
분야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청년단체
설립연도/일시 1919년 7월연표보기

[정의]

1920년대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 있었던 계몽 운동 관련 청년 단체.

[개설]

3·1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청년수양단체들은 야학, 생활 개선과 같은 민중계몽 활동, 강연회·토론회·연극회·체육회와 같은 문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 활성화된 민족개조운동, 농촌계몽운동,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등은 청년수양운동과 그 흐름을 같이 하는 신문화운동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사회주의 사상이 보급되면서 청년수양단체에도 변화가 일어나 새로운 청년단체를 결성하거나 그 단체의 조직 성격을 개조하는 등의 움직임이 전개되었다. 혁신적인 청년들이 주도하는 청년회 혁신총회가 개최되어 조직 강령과 규약을 개조하고 새로운 활동 노선을 정립하여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신간회와 3총 조직(청년총동맹·농민총동맹·노동총동맹) 등의 지회 조직을 군 단위로 결성하고 관료-유지 지배체제에 대항하여 여러 형태로 지역운동이나 민족·민중운동을 주도하였다.

[설립목적]

공주청년수양회 연혁에 의하면, 공주청년수양회는 공주 지역의 여론과 민의를 대표하는 활동을 목적으로 하여 좌담, 연설, 실제 행동, 연극 등으로 일반인에게 지식을 보급하고, 풍기를 숙정하며, 옛 도덕을 배척하고 새로운 도덕을 건설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변천]

공주 지역에서 청년수양운동은 3·1운동 이전인 1918년경부터 추진되었다. 당시 공주 지역에는 서덕순·김수철·노정학 등이 조직한 공주청년회와 이범규·이상덕 등이 조직한 청년구락부가 있었다. 1915년경부터 일본 본토에서는 문부성 및 내무성과 육군이 주도하여 각 지역의 청년단체를 관제 청년단체로 개편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조선 내에서도 조선총독부의 장려 아래 이러한 개편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공주청년회와 청년구락부는 이러한 맥락 아래 관료-유지 지배체제 성격을 띤 반공식적인 군민 대표기관이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7월 공주청년회와 청년구락부는 공주청년수양회를 발족하고 읍내의 청년 유지 140여 명으로 구성하였다. 1921년 7월 제2회 총회에서 회장 유정현, 부회장 성진영, 총무 이상덕·이현주, 지육부장 서덕순, 덕육부장 이익모, 체육부장 이범규, 구락부장 서정학, 재무부장 권석신, 서기 심홍섭·윤철순 등을 선출하였다. 1923년 3월 경성에서 개최된 전조선청년당대회에 부회장 성진영을 대표로 파견하는 등 중앙 단체와 연계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활동사항]

공주청년수양회는 대표적 활동으로 노동 야학을 실시하였다. 1921년 10월 봉황동의 회관에 노동야학강습회를 열고 40여 명 정도의 학생을 모집하여 가르치기 시작하여 1925년경에는 무보수 강사로 홍범식·김기창·김수철·심홍섭·민영용·임우빈·서달순·신경순·최익진 등 9명이 있을 정도로 활성화되었다.

1929년 1월에는 공주군 내 각종 강습회·야학회·야학당·야학원 등의 명칭으로 13개소 야학에서 교사 43명이 학생 723명을 교육할 정도로 야학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또한 공주청년수양회는 연극 공연이나 체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에 동경유학생학우회의 순회강연단을 조직하여 순회강연을 실시하고 조선여자교육회 강연단과 전선학생대회 강연단 등을 초청하여 강연회와 토론회 등을 개최하였다.

1921년 7월에 회원으로 소인극(연극)단을 조직하여 9월 말부터 10월 초순까지 민중계몽을 위한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하였다. 체육부 주관으로 공주 인근 지역의 청년단체 연합축구대회를 개최하고 지역 학교와 단체가 참여하는 정구대회를 주최하기도 하였다.

충남고등보통학교 유치와 관련하여 홍성 지역과 치열한 경쟁이 있을 때에 공주청년수양회는 공주고등보교 기성회에 적극 참여하여 공주 유지들과 함께 1922년 4월 충남고등보통학교를 공주로 유치하였고, 공주보통학교의 입학난에 교섭위원을 선출하여 학급 증설 청원을 주도하였다. 또한 「공주청년수양회가」를 만들어 부르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1920년대 민족운동의 한 흐름인 노동 야학 등을 통하여 민중계몽을 전개하고 지역 문제 해결과 발전에 기여하였으나 일제와의 협력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활동했다는 한계가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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