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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2602
한자 靑年團體
영어의미역 Youth Organiza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내수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서 청년층에 의하여 조직되고 운영되었던 단체.

[개설]

청년운동이란 청년들에 의해 수행되는 운동으로, 청년의 공통적인 세대적 특성에 기초해서 사회적 처지로 인해 고통 받는 각계각층 청년들이 자주성을 옹호하고 실현하기 위하여 전개하는 운동이다. 이러한 사회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각계각층의 청년층들이 조직하고 운영해온 단체를 청년단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의 청년운동은 3·1운동 이후 민족 운동이 대중적으로 성장하면서 계급적 계층적 공통성에 기반을 한 계층 운동 또는 부문별 계열 운동으로 다양하게 발전하여 가면서 등장하였다. 1920년에 전국에 수양과 계몽을 목적으로 하는 청년단체가 251개였고, 1921년에는 446개로 증가하였다.

[청년운동과 청년단체]

공주 지역에 등장한 최초의 사회 운동 단체는 와세다대학 풀신인 서덕순, 영명학교 조수 김수철, 구한만 군주사를 지낸 노정학 등이 1918년에 창립한 공주청년회와, 비슷한 시기에 구한말 주사를 지낸 이범규와 이상덕 등이 조직한 청년구락부였다. 이 두 단체의 주도 인물들은 주로 읍내에 거주하던 구한말의 새양반이나 그 자제들이었는데, 이런 유형의 청년 수양 단체들은 다른 지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부분 군수와 경찰서장의 후원하에 조직되는 것이 보통이다.

1918년경에 조직된 공주청년회와 청년구락부는 관료와 지역 유지의 지배 체제를 형성하기 위하여 총독부가 의도적으로 조직을 장려한 일종의 반공식적인 군민 대표기관이었다. 공주청년회의 대표들은 고종의 인산날인 3월 3일에 ‘공주군민 일동’ 명의로 굴건제복 차림으로 배종을 하기도 했는데, 이런 사실은 「공주청년수양회 연혁」에 있듯이, 공주청년회가 ‘공주 여론과 민의를 대표하여 활동’하는 일종의 반(半) 공인된 군민(유지) 대표기관이었음을 반증한다.

회고에 따르면 당시 공주청년회 회원이었던 김수철·김영배·서덕순 등이 영명학교 만세 시위 사건에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고 한다. 이후 어떤 계기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공주청년회와 청년구락부 두 단체는 1919년 7월 조직을 통합한 뒤 새롭게 공주청년수양회를 발족하였는데, 창립 당시 조직의 구성원은 읍내의 청년유지 14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공주 지역에서 청년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1918년경 이후로, 공주청년수양회가 첫 번째로 주력한 것은 노동 야학 활동이었다. 1920년 10월 공주청년수양회가 자신의 회관에서 문을 연 노동야학강습회는 창립 시기 학생 수는 40여명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규모가 커져 1925년에는 무보수 강사만도 홍범식·김기창·김수철·심홍섭·민병룡·임우빈·서달순·신경순·최익진 등 9명에 달했다고 한다. 1929년 1월 현재 노동야학강습회의 회장은 서덕순이었다. 1929년 1월 『동아일보』(1929.1.3)의 기사에 1929년 1월 현재 공주군에서 운영되고 있던 야학 현황을 소개하고 있다.

두 번째로 주목되는 것은 연극 공연이나 체육 활동이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공주청년수양회는 1920년에 동경유학생학우회의 순회강연단을 조직한 뒤, 지역 내에서 순회 강연을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여자교육화강연단, 전선학생대회강연단 등을 유치하여 강연 및 토론회 활동을 벌였다.

한편 공주청년수양회는 체육부 주관으로 공주·대전·강경·청주 등 각지 청년단체의 연합축구대회를 개최하였을 뿐만 아니라, 영명학교 잠우(蠶友)구락부·일본소학교·보통학교·식은(殖銀)구락부·공주지방법원 등의 정구단이 참가한 가운데 충남도청 코트에서 직장대항정구대회를 주최하기도 하였다.

세번째 주목되는 활동은 민원 해결 활동이었다. 1920년대 초반 공주에서 일어난 가장 큰 민원 사건은 공주고등보통학교 유치 관련 사건이었다. 당시 이 유치 문제를 둘러싸고 공주 유지들은 홍성 유지들과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공주청년수양회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청년수양회 핵심 인물들은 공주 지역의 유지들로 충남고등보통학교(현재의 공주고등학교)를 공주 지역으로 유치하는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22년 4월 공주로 유치하는 데 성공하였다.

공주 지역의 청년운동과 청년단체들은 1925년 12월경부터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청년회 혁신 운동’이 활발하였다. 즉 공주 지역의 혁신 청년들은 1925년 11월 공주청년수양회공주(민중)청년회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1927년 12월에는 ‘혁신 총회’를 통해서 조직의 강령과 규약을 손질하였다.

물론 공주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관료나 유지 집단의 힘이 강력한 지역이었으므로 혁신 청년 운동이 그다지 활발한 편은 못되었다. 하지만 공주 지역의 혁신 청년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초반까지 꾸준히 지역 사회 운동을 주도하였다.

1929년 1월 3일자 『동아일보』 ‘지방 일람’에는 1929년 1월 현재 공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회 운동 단체들에 대한 소개 글이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당시 공주의 사회 운동 단체는 신간회 공주지회·공주청년회·동대청년회·공주소년동맹 등이었는데, 동대청년회를 제외한 단체는 대부분 혁신청년들이 주도하던 진보적인 활동 단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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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일제강점기 청년단체 현황

[의의와 평가]

공주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관료나 유지 집단의 힘이 강력한 지역이었으므로 청년 운동이 그다지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한 편이었다. 공주 지역의 혁신 청년과 청년 단체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꾸준히 공주 지역에서 사회 운동을 주도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10.31 관련 시청각 연결 GC017P2957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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