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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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徐悳淳 |
영어음역 | Seo Deoksun |
영어의미역 | Seo Deoksu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형국 |
[정의]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공주 출신의 경제인.
[활동사항]
서덕순은 1892년(고종 29) 2월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서 출생하였다. 서덕순의 부친 서한보(徐漢輔)는 조선 말기 관리출신으로 1901년 중추원 의관, 1911년 공주군 참사를 지낸 인물로 1890년경부터 대지주로의 면모를 갖추었다. 서덕순은 조선 말기 명화학교(明化學校)를 다니다가 1910년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1913년 와세다대학 정경과를 졸업하였다. 유학을 마친 서덕순은 귀국하여 1917년부터 영명학교 교사를 역임하였다.
서덕순은 1919년 4월 1일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주도한 독립 만세 운동에 여러 가지 지원을 하였으며, 공주청년수양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21년 7월 공주청년수양회 총회에서 서덕순은 지육부장에 선임되었으며, 노동야학 운영·연극 공연·연설회 유치·고등보통학교 유치·체육행사 주관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서덕순은 1927년 9월 결성된 신간회 공주지회 부회장직을 맡았으나, 신간회 공주지회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서덕순은 부친인 서한보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기반으로 활발한 경제활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을 전후하여 적극적으로 농외투자를 하였는데, 식산은행·조선기독교창문사·남선제사 등에 투자하였다. 특히 남선제사는 1929년 일본인 환산호지조(丸山虎之助)가 설립하였는데, 공주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서덕순은 그의 동생 서범순과 함께 많은 투자를 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서덕순은 대부분의 토지를 유상몰수 당하여 경제적 기반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서덕순은 미군정 시기 충청남도 내무부장을 거쳐 1947년 10월부터 1948년 10월까지 충청남도 도지사로서 활동하였다. 충청남도 도지사 재임 기간 중 서덕순은 도립사범학교를 유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25전쟁 시기에는 공주시국대책위원회 위원장과 충남피난민연락사무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