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687 |
---|---|
한자 | 天主敎敎友村 |
영어의미역 | The Village of Brothers in the Same Faith of Roman Catholicism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차기진 |
[정의]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서 19세기 천주교 박해기에 천주교도들이 비밀리에 은거해 살던 마을.
[개설]
엄격한 의미에서는 천주교도들만으로 이루어진 신자 공동체형 교우촌을 뜻하지만, 넓게는 신자와 비신자가 함께 사는 혼거형 교우촌까지도 포함시킨다. 특히 공주 지역에는 박해가 끝난 뒤에도 이와 유사한 교우촌이 각처에 새로 형성되었다.
[연원]
기록에 처음 나타나는 공주 지역의 천주교 교우촌은 수리치골(현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봉갑리)이다. 1846년 11월 2일 프랑스 선교사 다블뤼(Daveluy, 安敦伊) 등이 이곳에서 성모성심회(聖母聖心會)라는 신심 단체를 설립한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교우촌이 형성되었을 것이지만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 1866년의 병인박해 때까지 공주 지역에는 둠벙이(현 공주시 신풍면 조평리), 진밭(현 공주시 사곡면 신영리), 국실(현 공주시 반포면 국곡리), 먹방이(현 공주시 신풍면 쌍대리), 질울(현 공주시 정안면 고성리), 관불(현 공주시 유구읍 녹천리), 만년동(현 공주시 유구읍 만천리), 용수골(현 공주시 사곡면 유룡리)과 접티(미상)에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신자 공동체형 교우촌이었다. 반면에 덤티(현 공주시 사곡면 가교리), 덤골(현 공주시 신풍면 백룡리), 적바위(현 공주시 유구읍 문금리), 소랑이(현 공주시 정안면 내문리), 지석골(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도가니(현 공주시 우성면 안양리) 교우촌은 혼거형 교우촌이었다.
1861년 10월 둠벙이(현 공주시 신풍면 조평리)와 진밭(현 공주시 사곡면 신영리)은 지역 본당(本堂, 신부가 상주하는 지역 신자 공동체)의 중심지로 설정되어 프랑스 선교사 조안노(Joanne, 吳)와 리델(Ridel, 李福明)이 각각 거처하였다.
그 중에서 조안노는 1863년에 사망하여 둠벙이에 묻혔고, 리델은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진밭을 떠나 버시니 교우촌(현 공주시 신풍면 선학리)·관불 교우촌을 거쳐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그리고 병인박해 때 공주 지역의 교우촌들은 대부분 폐허가 되었다.
[박해기 종식 후의 교우촌]
1870년대 초에 박해가 종식되면서 공주 지역에는 또 다른 교우촌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 선교사 두세(Doucet, 丁加彌)가 처음 공주 지역을 순방한 1883~1884년에 공소(公所, 본당보다 작은 신자 공동체)로 설정된 곳은 유구의 서재(현 공주시 유구읍 명곡1리)와 요골(현 공주시 유구읍 명곡2리), 무재(현 공주시 우성면 봉현리) 등이다. 이어 다음해에는 박해기의 버시니 교우촌이 재건되었다.
두세는 1885~1886년에 산막(현 공주시 사곡면 구계리)을 새 공소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사기점골(현 공주시 유구읍 명곡1리)을, 1887~1888년에는 안말(현 공주시 정안면 내촌리)과 운암산(현 공주시 탄천면 운암리) 교우촌을 공소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1886년의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공식적으로 용인되면서 교우촌의 의미는 점차 퇴색되어 갔다.
[의의와 평가]
천주교 박해기의 공주 지역 교우촌은 천주교 전파의 근거지요 지역 본당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하였다. 박해 이후에도 교우촌은 공주 천주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특히 공주시 유구읍 명곡2리에 있는 요골공소는 1897년 5월 8일 공주본당이 설립된 후 프랑스 선교사 기낭(Guinnand, 陳普安)의 임시 거처로 이용되었다. 또 요골과 1909년에 공소로 설정되는 사랑골(현 공주시 신풍면 평소리)의 옹기점 교우촌에서는 이후 여러 명의 한국인 신부와 수도자를 배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