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1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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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建築 |
영어의미역 | Architecture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황종현 |
[정의]
충청남도 공주 지역에서 만들어진 건물이나 구조물.
[개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 환경은 시골, 도시 할 것 없이 비슷한 속성을 지니며, 그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도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마련이다. 그러나 각 지역마다 갖는 자연적, 인문사회적 배경에 따라 마치 사투리와도 같은 삶의 모습이 그들의 독특한 생활 환경에 투영되고, 이것이 확대된 도시의 모습은 그들 나름의 특성을 지니게 된다.
한옥 마을이 잘 보존되어 있는 지역은 공업 단지를 배경으로 성장한 지역과 다르며, 항구를 중심으로 발달된 지역은 내륙의 산지를 배경으로 한 지역과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모습과 지역적 환경은 이렇듯 깊은 관계를 가지면서 특성을 나타내고 있는데, 지역의 특성은 인문사회적 환경과 함께 그 지역의 공간 구조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고대]
공주 지역이 역사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백제의 웅진 천도가 이루어진 이후부터인데,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漢城)이 함락되었고, 개로왕이 전사하자, 475년(문주왕 1) 백제는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고 도시를 방어할 목적으로 공주 공산성을 건립하였다.
공주 공산성은 북쪽에 금강이 있기 때문에 자연적 방어선이 구축되었고, 나머지 삼면에는 높지 않은 야산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또한 공주 옥녀봉성, 이인산성, 상룡리 산성 등 주변에 많은 산성을 쌓아,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고 국력의 회복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현재 관련 유적으로 고마나루, 공주 정지산 유적, 공주 송산리 고분군 등이 남아 있다. 불교 유적으로는 백제 의자왕 때 보덕화상이 창건하였다는 신원사가 계룡면 양화리에 있다.
538년(성왕 16)에 사비(泗沘)[지금의 부여]로 도읍을 옮긴 뒤에도 이곳에 북방(北方)을 설치하고, 달솔(達率)을 웅진방령으로 임명하여 예하군을 관장하게 하였다. 백제 멸망 때에도 의자왕은 태자와 함께 웅진으로 피신하였다가 항복하였다.
백제를 점령한 신라는 686년(신문왕 6)에 웅천주(熊川州)를 설치하고 총관(摠官)을 파견하여, 13개 군 29개 현을 통할하게 하였다. 757년(경덕왕 16)에는 웅천주를 웅주로 개칭하고 9주 중의 하나로 편제하였다. 공주 공산성 안에서는 통일신라기의 대형 건물 터가 다수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웅천주의 치소와 관련한 유적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조선 세조 때 진관 체제 실시에 따라 공주에도 진관이 설치되어, 임천(林川), 한산(韓山), 전의(全義), 정산(定山), 은진(恩津) 등의 2군 10현을 거느리게 되었다. 공주목사는 첨절제사를 겸임하였으며, 1598년(선조 31)에는 충청감영이 공주로 이전되었다.
영조 때의 공주목은 26개 면 207개 리를 관할했으며, 오늘날의 대전시를 위시해 연기군, 부여군의 일부까지 포함하였다. 이 때의 관련 건축으로는 충청도관찰사가 행정 업무를 처리하던 선화당이 있는데, 충청도 도청이 1602년(선조 35)에 충주에서 공주로 옮겨지면서 처음에는 제민천 변에 위치하였으나, 18세기 초에 봉황동에 자리하였다. 1937년에 국립공주박물관 경내로 옮겨서 전시실로 사용되다가 1992년 공주시 웅진동에 복원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충청도가 기호학의 본거지로서 문화적 토양을 형성했던 것은 이러한 역사와 문화가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 불사와 관아 건축 그리고 유림의 고장에 걸 맞는 수많은 향교와 전통 가옥들이 건축되었고, 또한 현존하고 있다.
[근대]
근대 건축물로는 충남금융조합연합회회관(구 공주읍사무소, 공주시청), 봉황초등학교장 사택, 영명학교 구 본관, 공주중동성당, 선교사 주택 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공주는 부여와 더불어 백제의 도읍으로서 문화 창달의 온상이 되어 수준 높은 문화적 기반을 형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패자가 됨으로써 당시의 건축물을 찾아볼 수 없어 큰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