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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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雙大里王大洞長丞祭 |
영어의미역 | Guardian Post Religious Service of Ssangdae1-ri Wangdae-dong Village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쌍대1리 왕대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정숙 |
성격 | 장승제|마을 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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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시기/일시 | 음력 1월 14일 오후 7시 |
의례장소 | 왕대동 입구 |
신당/신체 | 장승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신풍면 쌍대리 왕대동에서 음력 정월 14일에 지내는 마을 제사.
[연원 및 변천]
쌍대1리 왕대동의 장승제가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지금으로부터 70~80년 전에도 기도가 시작되는 음력 정월 12일부터 동네에 들어오는 사람을 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하니 뿌리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신당/신체의 형태]
장승제의 신체가 되는 장승은 지금은 돌장승이지만,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전에는 해마다 나무로 제작하여 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임산물 벌채금지령이 내려지면서 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자, 일제강점기 때 탑밭(조선시대 절터)에 일본 사람들이 버리고 간 탑의 기단을 가져다 글씨를 써서 나름대로 석장승을 삼아 장승제를 지내왔다.
1990년 장승의 한미함을 이유로 새 장승을 마련하기 위해 마을에 사는 이종성과 이임동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협력하여 기금을 마련하였다. 기금이 부족하자 출향인사 가운데에서도 모금하여, 총 160만 원으로 온양에서 돌을 구입하여 지금의 돌장승을 마련했다.
따라서 마을 입구에는 장승 여러 기가 함께 세워져 있다. 정월 열나흗날 깎아 세운 나무장승과 솟대, 몇 년 전에 세운 석장승, 최근에 세운 또 다른 석장승 등이 그것이다. 가장 최근에 세운 석장승에는 각각 ‘상원당장군지위(上元唐將軍之位)’, ‘하원주장군지위(下元周將軍之位)’라는 명문이 쓰여 있다. 또한 금줄 위목은 오방신장 위목을 쓰며, 불밝이와 밀납초를 쓰지 않고 아직까지 돌기름에 백지 삼발이 심지로 쓰고 있다.
제일(祭日)에 앞서 장승 주위에는 금줄을 치고 ‘동방청제지위(東方淸帝之位)’, ‘서방백제지위(西方白帝之位)’, ‘남방적제지위(南方赤帝之位)’, ‘북방흑제지의(北方黑帝之義)’, ‘중앙황제지위(中央黃帝之位)’라고 쓴 길지를 늘여놓는다. 쌍대리 왕대동 입구 소로의 좌우에 최근에 석조한 듯한 석장승 한 쌍이 서 있다.
이 장승은 화강암을 비석처럼 깎은 것으로 전면에 ‘동방청제지위’, ‘서방백제지위’라고 음각되어 있다. 장승 곁에는 사시나무의 잔가지를 제거하고 이를 솟대 대신 사용한다. 솟대의 높이는 5m가량 된다. 장승의 크기는 높이 105㎝, 폭 32㎝, 두께 15㎝로, 양쪽이 동일하다.
[절차]
쌍대1리 왕대동의 장승제는 산신제를 지낸 후에 지낸다. 산신제와 장승제의 준비는 똑같이 제를 올리기 전 해부터 시작된다. 전 해 음력 10월 30일 동네에서 일부자금을 유치하고, 다음 해 정월 3일 고양유사 제관, 축관, 짐꾼 남자 5명과 여자 1명을 선정한 다음, 정월 12일부터 냉수로 목욕하고 공양주는 조라를 빚어놓고 기도에 들어가는 등 정성을 들인다.
13일에 남자 5인 중 2~3명이 아침 일찍 장으로 제물(祭物)을 사러 간다. 제물로 소머리·대추·밤·감·북어·다시마·양초 등을 준비하고, 15일에 먹을 음식도 마련한다. 14일에 마을 남자들은 다 모여서 장승솟대와 금줄을 만들고, 유사·제관·축관은 축문과 소지명단을 쓰며, 오방신장 위목을 써서 금줄을 달고 솟대와 금줄나무를 세운다.
오후 6시경이면 제물을 준비하여 산제당으로 올라가 공양을 지어 제사를 올린다. 산제가 끝나고 사람들이 마을로 내려오면 마을의 부녀자들은 ‘마중시루’라 하여 시루떡을 장독대에 올려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쌍대1리 왕대동의 장승제는 마을 사람들이 유사 집으로 와서 준비해놓은 장승 제물을 가지고 나감으로써 시작된다. 마을 입구에 마주보며 서 있는 선돌형 장승 앞에서 치른다.
장승 옆에는 상단부를 제거한 은수원사시나무를 세워놓았다. 먼저 마을 주민들은 풍장을 울리며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고 쓰인 농기를 들고 나간다. 장승 앞에는 오방신장을 위해 다섯 몫의 제물을 마련한다. 제물을 진설할 때에는 떡을 가운데 상에 놓고, 탕은 한 그릇씩, 북어와 잔도 따로 놓는다. 삼색실과는 산제에 썼던 것을 씻어서 나누어 놓는다.
제사는 장승제에 앞서서 치러지는 산제와 유사하게 하며 소지를 올리면 끝난다. 제사 후에는 모두 공양주 집에 모여서 음복한다. 15일 날 아침에 산제에 쓴 소머리로 국과 안주를 만들어 먹고 제사경비와 결산을 보고 한다. 그리고 마을 공동의 임금과 여러 가지 일을 토의, 결정한 후 농악놀이와 윷놀이 등을 하며 하루를 즐긴다.
[축문]
“복이 축왈 천지신명은 감응 강신하소서. 금년 대세는 기묘년이옵고 달로 칠월이요, 날로는 열아흐레, 일진은 계축일진이옵고 우리 동중 각인각성 집집마다 오늘 정성을 드리오니 반가이 흠향 즐거이 응감하소서. 우리 동중 남녀노소 입은 덕도 많거니와 금년 일 년 열두 달 삼백 육십 오일이 오고 갈지라도 연액·월액·일액·시액·삼재팔난·관재구설·근심걱정·우환가환을 외주월강 천리로 소멸하시어 소망성취 만사대통 점재 하옵실제 부귀공명 축원이라. 발원 축원 소원대로 우리 마을 물이 맑고 집집마다 불이 밝아 수화정명 점지될 재 명당 뜰엔 옥이 돋고, 옥당 뜰엔 명이 돋아 달 뜬 광명 해 뜬 세계로 점지하소서.”
[현황]
쌍대1리 왕대동 장승제는 지금도 제관 1명, 유사 2명이 주관하여 마을 입구의 장승 앞 제단에 소머리와 북어포·술·떡·과일 등을 올리고 지낸다. 장승 앞의 거리에서 지내는 노신제, 즉 거리제의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