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140 |
---|---|
한자 | 中學洞將軍祭 |
영어의미역 | Village-Ritual Ceremony of Junghak-dong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중학동 210|중동 147 |
집필자 | 구중회 |
성격 | 민간제의|마을 제사 |
---|---|
의례시기/일시 | 음력 1월 14일 밤 |
의례장소 | 충청남도 공주시 중학동 210|중동 147 |
[정의]
일제강점기에 충청남도 공주시의 대통교양 쪽 장소에서 열렸던 정초의 민간 제의(祭儀).
[개설]
중학동 장군제는 대통교를 기준으로 이남과 이북에서 정초의 행사 가운데 하나로 열렸다. 마을 사람들의 친목을 다지고 한해를 준비하는 마을 신앙의 한 형태였다. 가을에 열렸던 중동 별신굿과 함께 공주 지역의 양대 행사였다. 정초의 행사는 예축(豫祝) 제의, 가을에는 감사(感謝) 제의였다.
[연원 및 변천]
중학동 장군제의 연원은 은산 별신제와 같이 백제 유민들의 백제에 대한 향수에서 연유되었으며 마을의 질병 퇴치와 관련되어 있다고도 본다.
[신당/신체의 형태]
대통교 이남은 남녀장군(혹은 여장군)을, 이북은 남장군을 모셨다. 장군은 짚단 1~2동(1동은 100단)이 소요되었고, 몸집이 두세 아름이 되었다. 장군의 모양은 앉아 있는 형태였고, 마을을 돌 때는 장정 4~6명이 모셨다. 장군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썼으며, 창을 들고 활과 활통을 메었다. 갑옷과 투구는 각대기로 만들어 그렸고 창호지로 발랐다. 갑옷과 투구, 창과 활 따위는 은빛을 칠하여 반짝반짝 빛났고, 움직일 때마다 덜렁덜렁했다. 후대로 내려올수록 짚 대신 대나무로 틀을 만들고 창호지를 발라서 사용하기도 했다.
[절차]
중학동 장군제는 두 장소에서 각각 음력 1월 14일 밤에 열렸다. 그러나 마을에서 초상이나 부정한 일이 생기면 다음 달 복덕한 날로 연기되었다. 시행된 장소는 대통교를 기준으로 하였다. 남쪽은 현재 공주고등학교 교문 쪽의 제민천이 있는 중학동 210번지 공용주차장이고, 북쪽은 당시 시장관리사무소였던 중동 147번지인 명구의원 앞이다. 각각 두 장소에는 임시로 차일(遮日)을 치고 제석(祭席)을 설치하였다.
제관(祭官)은 각기 2~7명이었다. 선정 기준은 구장이나 마을 어른이 생기복덕(生氣福德)을 가려서 결정했다. 제관으로 선발되면 7일간 부정을 피하고 3일간은 매일 옷을 갈아입고 목욕재계를 올렸다. 마을 사람들도 모두 육식을 금하고 부정을 피하며 치성(致誠)을 드렸다. 당일인 열나흗날에는 마을 전체가 일제히 청소를 하고 마을 입구와 각 가정의 문 앞에 황토를 세 무더기씩 놓아서 부정을 쳤다.
제수는 떡·술·통(생)돼지·과일·포·육적이었다. 경비 조달 방법은 정월 초사흘부터 열흘까지 풍물로 걸립(乞粒)했다. 가가호호 순회하며 돈이나 곡식을 걷거나 또는 기부를 받았다. 1회 경비는 작게는 5원(圓), 크게는 120원 정도가 소요되었다고 한다. 제수는 화주(化主)의 집에서 담당했다. 행사가 소규모일 때는 제관들이 집행했지만, 대규모일 때는 무당을 불러다가 설위설경을 했다.
장군을 메고 온 마을을 돌다가 자정 무렵에 장군을 불태우는 것으로 마무리를 했다. 남장군을 모시는 산성동의 경우는 산성동, 제세당 다리, 도청 거리(현재 교동에서 공주대학교 부속고등학교), 대통거리(현재 국민도서), 능인학원(현재 중등초등학교 앞), 현재 국민은행 앞, 시장관리사무소 앞 광장(현재 명구의원 앞), 현재 국민은행 앞, 현재 터미널 지역, 미나리꽝 언덕으로 돌았다.
제의 순서는 축문 낭독, 소지 순으로 비교적 간단한 의례였다. 다만 가가호호 호주의 성명과 생년월일을 부르면서 축원을 했기 때문에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소지가 끝나면 음복 순서가 있었다. 이 음식을 먹으면 일 년 내내 병이 걸리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집으로 가지고 가서 집안 식구들이 나누어 먹었다. 제수는 음복하기 전 일부의 음식을 떼어서 묻기도 했다.
행사의 마지막은 대통교 못 미친 곳과 ‘미나리꽝’이었던 언덕이었다. 맨 마지막으로 일 년을 점치는 의례가 있었다. 장군은 각각 시내 중심을 향하여 세우고 불을 태웠는데 시내 쪽으로 넘어지느냐, 시내 바깥쪽으로 넘어지느냐를 점치는 행위였다. 시내 쪽으로 넘어지면 그 해에는 액운이 오고, 시내 바깥쪽으로 넘어지면 행운이 온다고 믿었다.
이러한 심리적 현상으로 장군을 자리에 놓을 때 시내 바깥으로 넘어지도록 약간 높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거의 시내 바깥 방향으로 넘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바람이 심하게 불거나 하면 시내 쪽으로 넘어져 일 년 내내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현황]
중학동 장군제는 1992년 백제문화제 때 복원하고자 했으나 실행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