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026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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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公州艇止山遺蹟 |
영어의미역 | Remains at Mt. Jeongjisan in Gongj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물 산포지 |
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산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정금윤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6년 11월 6일 - 공주 정지산 유적 사적 제474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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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공주 정지산 유적 사적 재지정 |
성격 | 제사 시설 |
지정면적 | 34,077㎡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산1 외 7필지 |
소유자 | 공유 및 사유 |
관리자 | 공주시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
[정의]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정지산에 있는 백제시대의 제사 유적.
[위치]
정지산 능선은 송산리 고분군에서 금강쪽으로 북동 20°의 축으로 형성되어 있다. 공주 정지산 유적은 정지산의 정상에 위치한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공주 정지산 유적은 1996년 백제문화권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건설 중인 공주-부여 간 백제큰길 건설 공사 과정에서 국립공주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유적이 조성된 시기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 능선 전체에 수혈 주거지와 저장공이 입지하는 시기, 둘째, 주거 시설이 폐기되고 능선상에 국가 시설물이 계획성 있게 배치되는 시기, 셋째, 국가 시설물이 폐기된 후 7세기대의 석실묘와 옹관이 만들어지는 시기로 나뉜다.
유적은 대부분 백제가 웅진에 도읍한 시기의 집자리와 국가 제사 시설이 확인되었으며, 일부는 사비 도읍기의 무덤과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의 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웅진 도읍기의 유적은 두 시기에 걸쳐 있다. 먼저 능선의 정상과 산사면에 약 30여 기의 움집과 지상 건물이 있었던 시기와 이보다 조금 늦게 대규모의 토목 공사를 통해 국가의 특수 시설물이 만들어져 관리되었던 시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복주머니 모양의 저장 구덩이도 30여 기가 조사되었는데, 국가 시설과 함께 만들어진 저장공은 약 10여 기가 밀집되어 있다.
[형태]
유적 내의 시설물은 이미 있었던 가옥을 모두 철거한 뒤 능선을 깎아 내어 넓고 평탄한 대지에 만들었다. 공주 공산성(公山城)이 바라보이는 남동쪽으로는 약 3겹 내지 5겹의 나무 울타리를 돌렸으며, 송산리 고분군쪽으로 연결되는 능선에는 약 1m 내외의 좁은 출입구만 남긴 채 너비 5m, 길이 2m 이상의 넓고 깊은 도랑을 파고 내부에 몇 채의 건물을 축조하였다.
중심 건물은 내부의 중앙에 주축을 남북 방향으로 하고 있으며, 궁궐과 사원 등 국가의 중요 시설에서만 사용된 8잎의 연꽃잎을 새긴 기와를 사용하고 있다. 사방을 ‘ㄴ’자 모양으로 깎아낸 돌출부에 5개의 기둥을 받치고 한번에 8~9개의 기둥을 세운 후 지붕에 기와를 얹어 만들었다. 그런데 기둥을 받쳐주는 돌로 만든 기초 시설이 없는 특이한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이 건물의 몇 동과 내부의 울타리로 구획된 공간이 계획성 있게 배치되어 있다.
[출토유물]
유물은 화려한 장식이 부착된 장고형 그릇 받침 약 10여 점, 세발 토기 10여 점, 뚜껑 접시 약 20여 점, 벽돌 5점, 기와, 화려한 문양이 시문된 경질 토기가 많이 출토 되었다.
[의의와 평가]
공주 정지산 유적은 출토유물과 유구, 유적의 전체적인 모습을 종합해 볼 때, 백제 웅진 도읍기에 왕이 하늘에 천제(天祭)를 지내는 국가 제사와 관련되어 만들어진 제단 시설로 판단된다. 유구 내부에서 출토되는 사격자문(斜格子文)의 전(塼)으로 보아 6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부여 시기의 분묘 유적과 중복되어 있는 상황으로 보아 6세기 후반에는 그 기능이 폐기된 것으로 생각된다. 2006년 11월 6일 사적 제47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