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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1700453
한자 百濟
영어음역 Baekj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공주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서정석

[정의]

BC 18년부터 660년까지 존속한 삼국시대 고대국가의 하나.

[개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는 BC 18년에 건국하여 660년에 나당연합군에게 망하여 678년간 존속한 것으로 되어 있다. 백제는 이렇게 장구한 세월을 유지하는 동안 2번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따라서 흔히 백제의 역사는 도읍지를 기준으로 한성시대(BC 18~AD 475)·웅진시대(475~538)·사비시대(538~660)로 나뉜다.

[한성시대]

백제는 부여족 계통의 온조 집단에 의해 오늘날의 서울시 송파구 일대에 처음으로 자리를 잡았다. 점차 마한의 소국(小國)들을 병합하여 마침내 한강 유역의 지배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고이왕 때에는 관제를 정비하는 등 고대국가로서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근초고왕 때에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추진하여 황해도 신계에서 전라남도 해안가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그후 남진하는 고구려 세력에 밀려 마침내 개로왕이 한성에서 피살됨으로써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웅진시대]

왕도(王都) 함락, 개로왕 피살, 웅진 천도는 백제 왕실의 권위를 크게 약화시켰다. 그에 따라 웅진 초기에는 귀족들이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하였다. 문주왕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동생인 곤지(昆支)를 내세웠으나 귀족을 억제하지는 못했다. 마침내 문주왕해구(解仇)가 시킨 자객에 의해 피살되었다.

문주왕을 뒤이어 왕위에 올랐던 삼근왕도 재위 3년째이던 479년에 죽음을 당했다. 당시 나이가 15세에 불과했음을 감안해볼 때 자연사라기보다는 모종의 암투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가 천도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왕권을 안정시키기 시작한 것은 동성왕 때부터다. 동성왕은 23년간 재위하면서 새로이 신진 세력들을 등용함으로써 왕위를 넘보던 구 귀족 세력과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궁실을 수리하고, 산성을 통해 수도 방비체제를 완비하며, 중국과의 교류를 재개하는 등 다방면에 걸친 개혁을 통해 정치적인 안정과 왕권 강화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를 통해 동성왕은 구 귀족들을 누르고 정치적인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귀족과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되었다. 그에 따라 가림성 성주 백가(苩加)가 보낸 자객에 의해 동성왕 역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일본서기』에는 동성왕의 죽음을 포학 무도하여 국인(國人)들이 제거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동성왕의 개혁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았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동성왕을 뒤이어 왕위에 오른 무령왕은 고구려와의 경쟁에서 종래와는 달리 적극적인 공격을 가함으로써 고구려와 세력 균형을 유지하였다. 또한 농사를 장려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등 효율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과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성왕 때에는 마침내 사비 천도를 단행할 수 있었다.

[사비시대]

성왕은 백제의 숙원 사업이던 한강 유역의 잃어버린 땅을 되찾았다. 그러나 동맹국이던 신라의 배신으로 되찾은 한강 유역은 곧바로 신라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격분한 성왕은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나섰으나 오히려 관산성전투에서 신라군에 패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관산성 전투의 패배와 성왕의 죽음으로 왕권은 쇠퇴되었으며, 이에 따라 귀족 연립적인 정치 운영이 불가피해졌다. 이러한 정치 구도를 깨고 다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무왕은 익산으로의 천도를 꿈꿨다.

의자왕 역시 즉위 초에 친위 정변을 기도하여 많은 반대 세력들을 제거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어느 정도 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자왕은 후반기에 들어 무모한 전쟁을 계속함으로써 국력을 피폐하게 했으며, 사치 생활로 재정을 낭비하는 등 나당연합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다가 백제의 멸망을 맞이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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