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전라수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460
한자 全羅水營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종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정 시기/일시 1408년 - 전라수영 무안현 대굴포로 이전
관할 지역 전라수영 - 전라북도 군산시

[정의]

조선 초기 전라도 지역 해상 및 연안 일대를 방어하기 위해 군산 지역에 설치한 수군 기지.

[개설]

15세기 조선의 도서·연해 지역은 왜구의 침입으로 피해가 극심하였다. 왜구의 침입은 군·현을 모두 피폐하게 만들었고 교통과 통신의 마비는 물론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

조선 정부는 왜구의 침입으로 발생하는 피해를 막기 위해 각 연안 일대에 수군진을 설치하였다. 전라도에도 서·남해안으로 출몰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옥구현 지역에 전라도 해상 방어 중심 기지인 전라수영을 설치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388년(우왕 14) 5월, 요동 정벌을 위해 출정한 좌군도통사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 일파를 제거한 뒤, 우왕을 폐위시키고 창왕을 옹립하면서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이성계는 북방에서 철수시킨 군사를 왜구 토벌에 집중했으나 결과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1392년 7월, 새 왕조 조선의 태조로 등극한 이성계는 고려의 통치 체제를 유지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 건설을 통해 새로운 왕조 수립을 꾀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태조 시기에는 정치적·군사적으로 해결해야 할 난제가 산적해 있었고, 왜구 문제는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고려 말기 왜구의 폐해를 경험했던 태조 이성계는 자신이 왜구 토벌에 전공을 세워 출세한 뒤에 새 왕조를 개창했기 때문에 개국 초기부터 왜구 토벌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급선무였다. 이 때문에 이성계는 왜구에 대해 ‘국가에서 근심하는 것이 왜적보다 심한 것이 없다’고 언급하면서 연해의 방비를 더욱 튼튼히 하도록 조처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조는 왜구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에 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를 파견하여 해당 지역을 방어하도록 조처했다.

전라도 지역에는 김빈길(金贇吉)이 수군도절제사로 파견되었는데, 그의 건의로 전라도 지역에 처음으로 수군진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전라수영의 설치 시기도 김빈길이 수군도절제사로 활약하는 태조~정종 대의 어느 시기로 추정된다.

[관련 기록]

군산 지역에 언제 전라수영이 설치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전라수영이 옥구에서 무안 대굴포로 옮겼다는 기사가 『태종 실록』 권16, 태종 8년 12월 정유년조에 쓰여 있다.

[내용]

군산 지역에 있었던 전라수영은 기록이 거의 없어 자세한 실상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전라도 해상 방어의 중심기지인 전라수영을 옥구에 왜 설치하였는지는 추정이 가능하다. 옥구는 조선 태조 때부터 첨절제사가 지휘하는 옥구진이 설치된 곳이었다. 이는 옥구가 군사적 요충지로서 매우 중요한 곳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옥구가 군사적 요충지로서 어떠한 특성이 있는지 『1872년 지방지도』「옥구현」 지도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지도를 살펴보면 옥구현과 그 주변의 섬을 중심으로 조운선과 상선의 해로가 표시되어 있다. 또한 옥구가 강과 바다가 만나는 접경에 자리하고 있어서 수상교통의 요지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지도 북쪽에 있는 칠읍봉세해창(七邑捧稅海倉)은 옥구의 지정학적 위치를 부각시켜 주는데 옥구, 전주, 태인, 금구, 임실, 진안, 장수 등의 7개 고을의 조세를 모아 서울 경창으로 보냈던 곳이었다. 옥구현 서쪽 바다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있다. 주변에 섬들이 자리잡음으로써 바람이 적고 방어상 은폐하기도 적합하였을 뿐만 아니라 강가 바다가 만나는 접경지대에 자리하여 고대부터 선박들이 정박하기에 용이하였다. 이와 같은 조건을 두루 갖춘 옥구가 수군진을 설치하는데 최적의 장소였으며, 당시 수군진의 입지 조건과 일맥상통하였다

조선 전기 수군진의 입지 조건은 바람이 없는 곳, 방어상 은폐가 용이한 곳, 선박이 자유롭게 정박할 수 있는 곳, 물이 풍부한 곳 등을 들 수 있는데 옥구는 이러한 입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어 수영을 설치하는데 최적의 장소였다.

[변천]

태종 이후부터 왜구의 주 침입 지역이 전라도 남쪽으로 집중되면서 전라수영을 옮겨 설치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즉 적이 나타났을 때, 즉각 대응할 수 있는 곳에 수영이 있어야 하는데 옥구는 전라도 최 서북단에 위치하여 왜구의 침입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이는 1407년(태종 8)에 전라도 수군 도절제사가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올린 “옥구 수영은 해로의 중앙이 아니기 때문에 진술(鎭戌)에 합당하지 않으니 수영을 모두 옥구진에 소속시키고 해도(海島) 중앙에 있는 무안현 대굴포로 수영을 옮기소서”라는 건의 사항에서 알 수 있다. 태종은 수군도절제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라수영을 무안현 대굴포로 옮겼다[1408년 이후 기사부터 전라수영의 위치가 무안현 대굴포로 나타난다].

[의의와 평가]

전라수영을 통해 군산이 근대 이전부터 군사적·경제적 중심 도시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