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142010
한자 神貞王后
영어공식명칭 Sinjeong Wanghu
이칭/별칭 조대비,신정 익황후
분야 역사/ 전통 시대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경기도 구리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민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08년연표보기 - 신정왕후 출생
혼인 시기/일시 1819년 - 신정왕후 익종과 혼인
활동 시기/일시 1819년 - 신정왕후 세자빈으로 책봉
활동 시기/일시 1863년 - 신정왕후 수렴청정 시작
활동 시기/일시 1866년 - 신정왕후 수렴청정 종료
몰년 시기/일시 1890년연표보기 - 신정왕후 승하
묘소|단소 신정왕후 수릉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동구동 66]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종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훈정동 1]
성격 전통 시대 인물/왕족·호족
성별
본관 풍양

[정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수릉에 묻힌 조선 후기의 왕비.

[개설]

신정왕후(神貞王后)는 조선의 추존왕 익종(翼宗)의 왕비이다.

[가계]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아버지는 풍은부원군(豊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으로, 시호는 충경(忠敬)이다. 어머니는 송준길(宋浚吉)의 후손으로 목사를 지낸 송시연(宋時淵)의 딸이다. 익종과의 사이에서 아들 헌종(憲宗)을 낳았다.

[활동 사항]

신정왕후는 1808년(순조 8)에 두포(荳浦) 쌍호정(雙湖亭) 사저에서 태어났다. 1819년(순조 19)에 익종과 혼인하여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1827년에 헌종을 낳았다. 1827년 당시 세자였던 익종이 부왕 순조(純祖)를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기 시작하였다가, 불행하게도 대리청정한 지 4년 만인 183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익종의 대리청정 이후로 신정왕후의 인척인 풍양조씨 일문이 대거 정계에 진출하여,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안동김씨 일문과 대립하며 세도정치기를 이끌었다.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신정왕후는 왕대비가 되었고, 1863년 헌종의 뒤를 이었던 철종(哲宗)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의 권한으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고종]을 즉위하게 하여 수렴청정을 시작하였다. 1866년(고종 3)에는 수렴청정을 물리고 흥선대원군으로 하여금 정사를 돌보도록 하였다. 1890년(고종 27)에 경복궁 흥복전에서 향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신정왕후익종과 함께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 수릉(綏陵)에 묻혀 있다. 수릉은 한 봉분 안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우상좌하(右上左下)의 형태로 왕을 오른쪽, 왕비를 왼쪽에 모시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수릉은 일반적인 원칙과는 반대로, 익종이 왼쪽, 신정왕후가 오른쪽에 모셔져 있다. 익종은 세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고 신정왕후는 왕비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신분 차이에 근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릉은 현재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두 번의 천릉을 거쳤다. 본래 수릉이 조성되었던 위치는 현재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있는 경종(景宗)의 의릉(懿陵) 왼편이었다. 그러나 1846년(헌종 12)에 풍수상으로 좋지 않은 위치라 하여 양주 용마봉[현 서울특별시 광진구 용마산]으로 옮겼다가, 1855년(철종 6)에 다시 천릉하여 동구릉 경내의 현재 위치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 1890년(고종 27)에 신정왕후가 사망하자 수릉에 합장릉의 형태로 능을 꾸며,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1970년 동구릉 전체가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신정왕후는 대한 제국이 선포되자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으로서 신정 익황후(神貞翼皇后)로 추존되었다. 신정왕후의 신위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셔 놓은 종묘에 봉안되어 있다. 종묘에서는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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