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8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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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鍾瓚 |
영어공식명칭 | I Jongcha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노익환 |
[정의]
일제 강점기 함안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종찬(李鍾瓚)[1883~1953]은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에서 비교적 부유한 자작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던 함안 지역 인사인 조한휘(趙漢輝)[한학 교사], 한종순(韓鍾淳)[당시 함안 면장 아들], 박건병(朴鍵秉)[동명 학교 교사], 강기수(姜琪秀)[동명 학교 교사], 조병흠(趙丙欽), 한관렬(韓灌烈)에게서 서울의 독립 운동에 관해 상세히 전해 들었다. 이들은 3월 19일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 운동을 모의하였다. 그들은 당시 함안군 대산면에 사는 안지호(安知鎬)와 연락을 취하며 3월 19일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을 결의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였다. 시위 당일 이종찬은 박노일(朴魯一), 안혁중(安赫中), 조계승(趙啓承) 등과 군중의 선두에서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9일 오후 2시 이종찬은 3,000여 명으로 늘어난 군중과 주재소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때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출동한 마산 경찰 서장 기타무라[北村]와 현지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려 하자, 군중은 격노하여 주재소로 들어가 공문서를 파기하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시위 군중은 군청의 문을 부수고 청사로 들어가서 군수 민인호(閔麟鎬)와 경찰 서장을 붙잡아 제복과 모자를 벗기고 독립 만세를 외치라고 요구하였다. 사기가 충천한 시위 군중은 등기소, 우편소, 일본인 소학교로 시위행진하며 건물을 파괴하였다.
당시 조한국(趙漢國), 강상중(姜相中)은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와 연락되는 전화선을 끊어 놓았다. 오후 5시 40분경 함안과의 전화가 불통되자 비상 사태가 돌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마산 중포병 대대 병력 16명이 도착하여 현지 경찰과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였다. 이종찬도 이때 체포되어 부산 지방 법원 마산 지청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 받았으나 불복하고 대구 복심 법원에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징역 3년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일제의 갖은 탄압과 수모를 당하였으며, 71세가 되던 1953년 8월 26일 작고하였다. 아들로 이성구(李成九)가 있다.
[상훈과 추모]
이종찬은 1977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