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3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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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一運動 |
영어공식명칭 | 3·1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혜영 |
발단 시기/일시 | 1919년 3월 2일 - 「독립선언서」 익산 각지 배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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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3월 10일 - 익산군 16개 면 시위 |
전개 시기/일시 | 1919년 3월 18일 - 금마 장날 시위[3월 18일] |
전개 시기/일시 | 1919년 3월 28일 - 금마 장날 시위[3월 28일] |
종결 시기/일시 | 1919년 4월 4일 - 이리 장날 만세 운동 |
발생|시작 장소 | 익산 - 전라북도 익산군 |
종결 장소 | 이리 - 전라북도 익산군 이리면 |
[정의]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전라북도 익산 지역에서 일어난 항일 독립 만세 운동.
[개설]
3·1운동 당시 익산에서는 천도교 조직을 활용하여 만세 운동을 계획하는 한편 기독교계와도 연계하여 천도교와 기독교 두 종교계가 함께 하였다. 특히 1919년 4월 4일 시위는 1,000여 명의 군중이 참여하여 시가행진을 벌였고 일본 헌병대가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현장에서 6명의 순국자를 낼 만큼 격렬하였다.
[역사적 배경]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본은 무단통치를 실시하였다. 무단통치 아래에서 우리 민족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빼앗겼다. 토지조사사업으로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였고 노동자들은 차별을 받았다. 갑오개혁 때 폐지된 태형제를 부활시켜 헌병 경찰에게 부여하였는데 자의로 부과하는 경우가 많아서 우리 민족의 저항은 강해져 갔다. 마침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사망하고 독살설이 유포되면서 이를 계기로 거족적인 만세 운동이 계획되었다.
[경과]
익산 지역 3·1운동은 어느 지역보다 천도교 중앙총부와 밀접한 관계 속에서 천도교의 조직을 잘 활용하여 전개되었다. 익산 출신 천도교인 오지영(吳知泳)이 서울중앙총부의 간부로 있었고 정용근(鄭瑢根)이 중앙총부의 의사원으로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9년 3월 2일 서울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 2,000장을 간사인 인종익이 이리로 가지고 내려와 이중달에게 일부를 전해 주었는데, 그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의 조직을 이용하여 익산 지역 곳곳에 배포되었다. 군내 각 지역 연락 및 동원 책임자는 황등·함열 이중열, 여산·용안 이유상, 황화·팔봉 정대원, 오산·춘포 유봉유, 함라·웅포 민영순, 성당·낭산 홍영섭, 망성·금마 고총권, 왕궁·삼기 신현성이었다.
한편 교구장 박영진은 익산군의 기독교 측과 연계하여 천도교와 기독교가 함께 하는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익산에서는 거사일을 천도교 기념일인 3월 10일 최제우가 순도한 날 밤으로 잡았다. 그러나 조직적인 준비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감시로 10일 거사일이 되기 전에 박영진 등 천도교 핵심 간부들이 검속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밤 9시가 되자 익산군 16개 면 곳곳에서 일제히 횃불을 올리는 것으로 신호를 삼아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그중에서도 여산의 이정, 박사국, 이병석 등이 주도한 횃불 시위가 가장 격렬하였다. ‘조선 자주 독립’이라고 쓴 깃발을 선두로 약 200여 명의 면민들이 여산면 헌병분견대 가까이까지 진출하였다. 1919년 3월 18일과 3월 28일 금마에서는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가 있었는데, 특히 왕궁면에 사는 김광덕, 송종석 등이 시장에서 모인 사람들을 설득하여 참여시킴으로서 오후 1시 무렵에는 수백 명으로 시위 군중이 늘어났다.
익산 지역 만세 운동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1919년 4월 4일의 시위이다. 동지들과 거사를 계획하고 준비하던 문용기는 이리 장날인 4월 4일을 택하여,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나눠 주고 시위를 지휘하였다. 그중에는 서울에서 유학하던 중 귀향한 중동학교 학생 김종현, 김철환, 이시웅, 박영문 등도 함께하였다. 만세 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은 문용기의 지휘에 따라 태극기를 흔들며 대열을 지어 시가를 행진하였다. 점차 참여자가 늘어나서 1,000여 명이 되자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제지하려 하였지만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자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까지 수백여 명을 동원하여 창검과 총, 곤봉을 휘두르며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시위 군중이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만세를 부르자 헌병대는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문용기, 박양문, 장경춘, 박도현, 서공유, 이충규 등 6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날 체포된 군중은 39명이었다.
[결과]
익산 각 지역의 만세 운동과 관련하여 시위대를 지도한 김광덕, 송종식, 이정, 박사국, 이명석, 고채주, 김치옥, 강성원 등이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1년~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그 가운데 김광덕, 송종식, 박영진, 정대원, 고채주, 김치옥, 강성원 등은 서울고등법원에까지 항고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성과 우리 민족의 정당성을 법정에서 당당히 주장함으로써 독립 정신을 유감없이 설파하였다.
[의의와 평가]
익산의 3·1운동은 어느 지역보다 천도교의 조직을 잘 활용하면서도 기독교계와 연계하여 두 종교가 함께 주도하여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