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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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益山古都里石造如來立像 |
영어공식명칭 | Stone standing Buddha in Iksan Godo-ri |
이칭/별칭 | 고도리 석불입상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유물/불상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400-2|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1086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안여진 |
제작 시기/일시 | 고려 후기 -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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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복원 시기/일시 | 1858년 -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보수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3년 1월 21일 -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보물 제46호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보물 재지정 |
원소재지 |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400-2|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동고도리 1086 |
성격 | 불상 |
재질 | 화강암 |
크기(높이) | 424㎝[총 높이]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익산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보물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와 동고도리에 마주 보고 있는 2구의 고려 후기 석조여래입상.
[개설]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益山古都里石造如來立像)은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의 서고도리와 동고도리에 마주 보고 있는 2구의 불상으로, 옥룡천을 사이에 두고 서고도리에 불상 1구, 동고도리에 불상 1구가 있다. ‘고도리 석불입상’이라고도 부른다.
1858년(철종 9) 고을 군수 황종석이 길가에 쓰러진 불상을 다시 세우고 세운 연유를 기록한 「군남쌍석불중건기비(郡南雙石佛重建記碑)」를 동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옆에 세웠다. 「군남쌍석불중건기비」의 비문에 “이 석상은 불상과 같다.”라는 내용과 함께 “금마가 동·서·북쪽 3면은 다 산으로 가로막혀 있는 데 반하여, 유독 남쪽이 터져 있어서 물이 다 흘러나가 허하게 생겼기에 이를 막기 위하여 석불을 세웠다. 금마의 주산인 금마산 형상이 마치 말 모양과 같다고 하여, 말에는 마부가 있어야 하므로 마부로서 인석(人石)을 세웠다.”라는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음력 12월 해일(亥日) 자시(子時)에 만나 새벽닭 우는 소리가 들리면 제자리로 돌아가서 석불이 된다는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관련 전설도 전하고 있다.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46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은 총 높이는 424㎝이며, 사각형 돌기둥에 머리부터 대좌까지 간략한 선각으로 조각되어 있고 머리 위에는 방형의 높은 관이 올려져 있다. 얼굴은 가늘게 뜬 눈, 작은 코, 가느다란 입술, 어깨에 닿을 만큼 내려진 긴 귀 등 단순하고 형식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서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은 동고도리 석조여래입상과는 달리 물결 모양의 콧수염이 인중과 턱부분에 얕은 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수인은 배 앞에 모은 형식이며 옷은 통견(通肩)[불상의 양 어깨를 모두 덮은 양식]으로 목에서부터 평행선으로 흘러내려 양쪽 발등 위에서 좌우로 벌어져 있다. 대좌는 앞쪽을 깎아 모를 내었고 발등은 간략하게 처리하였다. 머리에는 길쭉한 관대 위에 방형의 판석재로 된 갓이 놓여 있다. 갓 위에는 원형의 보개(寶蓋)가 조각되어 있다.
[특징]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은 고려 전기의 거불 조성(巨佛造成) 추세에 따라 조성된 전형적인 석주형 석불이다. 석주형의 불신과 길쭉한 관대 위에 얇은 판석의 갓과 보개 등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제323호]과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과 연관성이 보인다. 그러나 도식적이고 간략화된 얼굴과 신체 표현, 도포형의 옷, 부자연스러운 손의 표현 등은 고려 후기에 조성된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제100호]과 유사하여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의 조성 시기는 고려 후기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은 불교와 토착신앙의 습합 현상을 보여 주는 불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봉분처럼 쌓아 올린 흙더미 위에 마주 보고 서 있다는 점에서 마을을 수호하는 무속적 성격을 가진 석상으로도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