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1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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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彌勒塔-王宮塔- |
영어공식명칭 | Building the Maitreya Tower and the Royal Palace Tower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세인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639년 - 익산 미륵사지 석탑 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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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1년 - 「미륵탑과 왕궁탑 쌓기」 익산시사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익산시사』에 수록 |
관련 지명 | 익산 미륵사지 석탑 -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
관련 지명 |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
성격 | 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남매 |
모티프 유형 | 오누이 힘겨루기 |
[정의]
전라북도 익산시의 금마면과 왕궁면에 전하여 내려오는 미륵탑과 왕궁탑을 쌓은 두 남매에 관한 이야기.
[개설]
「미륵탑과 왕궁탑 쌓기」는 두 남매가 내기를 통해 각각 미륵탑(彌勒塔)과 왕궁탑(王宮塔)을 쌓아 올렸다는 이야기이다. 미륵탑은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의 익산 미륵사지 석탑(益山彌勒寺址石塔)을 말하며, 왕궁탑은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의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益山王宮里五層石塔)을 가리킨다. 미륵탑은 백제 무왕(武王)[?~641] 때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왕궁탑의 건립은 고려 전기부터 삼국시대까지 소급될 수 있어서 시기를 확정하기 어렵다. 두 석탑은 미륵탑이 국보 제11호로, 왕궁탑이 국보 제289호로 지정될 만큼 탑의 조형미가 뛰어나고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미륵탑과 왕궁탑 쌓기」는 백제 지역을 대표하는 두 석탑의 창건과 관련된 이야기인 데다, 남녀의 대결적 구도라는 흥미로운 요소도 갖추고 있어서 익산시의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유형으로 전승되고 있다.
[채록/수집 상황]
「미륵탑과 왕궁탑 쌓기」는 2001년에 발간된 『익산시사』에 같은 제목으로 2종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전체적인 서사 구조가 거의 유사한 이야기가 「남매 장사가 쌓은 미륵탑과 왕궁탑」, 「남자가 쌓은 왕궁탑과 여자가 쌓은 미륵탑」이라는 제목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설화 편에 실려 있다.
[내용]
『익산시사』에 실린 「미륵탑과 왕궁탑 쌓기 1」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남매가 있었는데, 남매는 서로 사이가 좋아서 누가 더 낫고 누가 못하다고 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남매가 탑 쌓기 내기를 하였는데, 누이는 미륵탑을 쌓기로 하고 오빠는 왕궁탑을 쌓기로 하였다. 그런데 누이는 미륵탑을 꼼꼼히 쌓느라고 시간 안에 다 쌓지 못하고, 오빠는 적은 규모로 건성건성 쌓아서 먼저 쌓았다. 그래서 내기에서 누이가 오빠에게 지고 말았고, 그 까닭에 미륵탑은 지금 반만 남아 있다. 미륵탑에 구렁이가 살고 있어서 하늘에서 벼락을 때려 절반이 떨어져 나가 반만 남은 것이라고도 한다.
「미륵탑과 왕궁탑 쌓기 2」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어떤 노인이 두 남매를 두었는데, 하루는 어떤 관상쟁이가 와서 보고는 당신은 아들, 딸 중에 하나만 데리고 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불길하다고 말하였다. 관상쟁이의 말을 들은 노인은 아들을 두고 딸을 내쫓기 위하여 각각 탑을 쌓게 하였다. 딸에게는 큰 미륵탑을 쌓게 하고 아들에게는 작은 왕궁탑을 쌓게 하여서 먼저 쌓은 자식은 집에 남기고 늦게 쌓은 자식은 집에서 내쫓는다고 말하였다. 딸은 큰 탑을 맡아 쌓으면서 동생에게 지지 않겠노라고 정성 들여 열심히 쌓았다. 동생은 작은 탑을 맡아 쌓으면서 천천히 쌓아도 되겠거니 하며 쉬엄쉬엄 엉성하게 쌓았다. 그런데 남매가 탑을 다 쌓고 손을 터는 시간이 똑같았다. 이러고 보니 노인은 딸을 쫓아낼 수가 없어 그냥 데리고 살았다고 한다.
『한국구비문학대계』 설화편에 수록된 「남매 장사가 쌓은 미륵탑과 왕궁탑」을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무왕이 두 남매를 시켜 각각 남자에게는 왕궁탑을, 여자에게는 미륵탑을 맡아서 쌓게 하였다. 두 사람은 손수 흙을 지고 날랐고, 사다리 같은 어떤 도구도 없이 아랫단을 사다리 삼아 한 단 한 단 흙과 맨손으로만 탑을 쌓았다. 때로는 돌을 가져다가 흙과 돌을 섞어 탑을 쌓기도 하였다. 두 사람은 힘이 장사여서 어지간한 것은 다 들어 올렸다. 이렇게 두 사람이 직접 흙과 돌을 등에 지고 날라서 쌓은 것이 미륵탑과 왕궁탑이다.
『한국구비문학대계』 설화편에 수록된 「남자가 쌓은 왕궁탑과 여자가 쌓은 미륵탑」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정리할 수 있다.
왕궁탑은 남자가 쌓고 미륵탑은 여자가 쌓았다. 여자가 쌓아 올리는 미륵탑의 규모가 더 컸는데, 여자는 치마에다 흙과 돌을 담아 나르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어떻게 여자의 몸으로 치마에 무거운 돌을 담아 옮기고, 그 돌을 부수어서 탑을 쌓을 수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모티프 분석]
「미륵탑과 왕궁탑 쌓기」 유형에 속하는 네 가지 종류의 이야기는 ‘오누이 힘겨루기’ 모티프를 그대로 차용하거나 일부 변용해서 활용하고 있다. 『익산시사』에 수록된 두 편에서는 전형적인 ‘오누이 힘겨루기’ 모티프가 드러난다. 그런데 힘겨루기의 결과는 다르다. 「미륵탑과 왕궁탑 쌓기 1」에서는 누이가 패배하지만, 「미륵탑과 왕궁탑 쌓기 2」에서는 누이가 승리하고 있다. 그러나 힘겨루기의 결과에 상관없이 두 이야기 모두 여성이 맡은 미륵탑은 정성을 다하여서 꼼꼼하게 쌓았고, 남성이 맡은 왕궁탑은 엉성하게 쌓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남매간의 대결 양상을 미륵탑과 왕궁탑의 각기 다른 조형미와 관련지어 볼 수도 있는 부분이다.
『한국구비문학대계』 설화편에 실린 두 편은 ‘오누이 힘겨루기’ 모티프를 차용하고 있지만, 남매간의 대결에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남매 장사가 쌓은 미륵탑과 왕궁탑」에서는 두 남매의 힘이 장사여서 어려운 탑 쌓기를 성공시켰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남자가 쌓은 왕궁탑과 여자가 쌓은 미륵탑」은 남매의 관계 설정조차도 하지 않고, 남성의 서사는 거의 드러나지 않은 채 여성의 힘으로 탑 쌓기라는 험난한 일을 해냈다는 신이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