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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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馬耳山塔寺-神秘-極致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남로 367[동촌리 8]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규영 |
소재지 | 탑사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남로 367[동촌리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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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전라북도 진안군 마이산 서봉 아래 탑사에는 80여 기의 자연석 돌탑들이 쌓여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 탑들 중 특히 가장 윗부분에 위치한 탑[천지탑]이 다른 탑들에 비하여 한층 그 규모나 결구와 조형미가 돋보인다. 탑의 구성을 보면 자연석을 원뿔형으로 쌓아 올린 탑이 5기, 넓적한 자연석을 포개 쌓은 외줄 탑이 80기에 이른다.
원뿔형 탑에는 각 이름을 부여했는데 위 천지탑 2기를 비롯하여 탑 무리 앞[남서쪽] 부분에 좌로부터 월광탑, 약사탑, 일광탑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는 사찰 약사전(藥師殿)에 있는 약사여래의 협시불로 좌측에 월광보살, 우측에 일광보살이 위치한 데서 이를 본떠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외줄 탑 중 규모가 웅대한 것은 천지탑 앞에 쌓여진 오방탑(五方塔)인데 동서남북 사방과 중앙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동서남북의 방향은 일치하지는 않고, 북동, 남동, 북서, 남서쪽을 가리키고 있다. 천지탑과 오방탑을 볼 때 이 탑들은 음양오행 탑이라 볼 수 있다. 천지탑은 음양탑의 다른 이름이고, 오방탑은 오행탑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국토를 비보하기 위한 목적의 축탑]
1. 불탑(佛塔)일까?
마이산의 석탑들은 자연석을 쌓아 올린 적석탑(積石塔)이다. 이와 같은 유형은 마이산 석탑 이전에는 유례가 드물다고 한다. 탑은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 ‘탑파(塔婆)’의 준말이다. 탑파는 파리어(巴梨語)의 thupa를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진신 사리를 봉안하는 묘(墓)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의 불교 수용과 탑파의 건립 경로는 중국을 거쳐 4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인도·중국과 다른 탑파 양식을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 시대 말기에 이르러 백제 지역에서는 목탑을 모방한 석탑이, 신라에서는 전탑(塼塔)을 모방한 석탑에서 시작되어, 결국 석탑이 우리나라 탑파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이상의 설명에서 보듯이 탑은 부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로 신앙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사리는 한정되어 있어 어느 경우에는 진신(眞身)이 아닌 법신(法身)으로 대치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탑은 이러한 사정상 하나의 절이 하나의 탑을 가지는 것이 상례였다. 그 형태도 석탑이 우리나라 탑파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적석탑으로 된 불탑(佛塔)이 있었다는 자료는 철원의 심원사 석대암(石臺庵)을 들고 있는 정도이다[석대암의 적석탑은 탑이라기보다는 적석단에 가깝다].
그렇다고 하여 마이산 적석탑들이 불탑의 기능을 했다고는 믿기 어렵다. 불탑은 사찰 경내에 있어야 하는데 마이산 적석탑 부근은 예전에는 사찰이 없었다. 물론 지금은 탑사(塔寺)가 들어서 있지만 그것은 1930년대 이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적석탑들이 불탑의 기능을 했으리라는 가능성은 배제된다고 생각한다.
2. 서낭당의 가능성
다른 가능성의 하나로 서낭당 또는 서낭 신앙이 거론된다. 서낭당이란 마을의 수호신으로 서낭을 모셔 놓은 신당으로 한자로 성황당(城隍堂)이라고도 한다.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아무렇게나 쌓아 놓은 돌무더기 형태다. 서낭당은 서낭신을 모신 신역으로서 신앙의 장소이다. 이곳을 내왕하는 사람들은 돌·나무·오색 천 등 무엇이든지 놓고 지나다녔다. 물론, 그곳의 물건을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 금기가 엄격하게 지켜졌다.
그러면 현재의 마이산 탑 자리에 서낭당 또는 성황사가 들어설 입지가 되는 지를 살펴보자. 서낭당은 보통 빈번한 교통로의 고갯마루에 들어서는 것이 보통인데 당시의 마이산은 빈번한 교통로가 아니라 험한 산길이었다. 마이산의 분수령인 천황문이 왕래가 빈번한 교통로였다면 그곳에 서낭당은 얼마든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서낭당 돌무더기의 흔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해 오는 이야기도 없으니 그 가능성은 일단 없는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그 고갯마루로부터 남쪽으로 약 300m 내려온 곳에 예의 그 돌탑들이 있다. 또 서당당의 적석은 아무렇게나 던져질 돌들로 이루어진 돌무덤이므로 정교하게 쌓여진 천지탑과는 그 종류를 달리하므로 더 거론할 필요도 없는 문제라 하겠다.
3. 비보 탑의 가능성
마이산 탑이 불탑도 아니고, 서낭당으로부터 유래된 탑도 아니라면 결국 비보(裨補)탑으로 귀착된다. 마이산은 이익(李瀷)이 지은 『성호사설』에 의하면 예전에는 호남의 물길이 사방으로 흩어진다고 해서 산발 사하(散髮四下)[머리가 풀어지고 물길이 사방으로 흩어진 모양]의 좋지 못한 형세로 보는 풍수관도 있다. 산발 사하란 호남의 금강·만경강·섬진강이 각각 북[금강], 서[만경강], 남[섬진강]으로 나누어져 흐르는 것으로, 모든 지천이 낙동강으로 합류하여 남으로 내려가는 영남과 대비하여 말하는 견강부회식 풍수론이다.
마이산을 이 산발 사하의 중심에 위치시켜 축이 되는 지형으로 본다면 이 점에서도 비보가 필요한 지형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여러 가지 관점에서 마이산에는 국토를 진호(鎭護)하기 위한 차원에서라도 비보해야 할 필요가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마이산에는 어느 시대, 어떤 형태로든지 비보가 행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만일 비보가 행해졌다면 마이산은 자갈과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므로 흔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비보 탑을 쌓았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4. 마이산 탑의 성격에 대한 고찰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천지탑은 불탑도 아니고 서낭당 같은 민간 신앙적 탑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은 비보를 위한 탑이라는 데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나아가 그 비보의 목적도 인근에 동네가 없었으므로 동네 차원의 비보가 아니라 국토를 진호(鎭護)하기 위한 왕조 차원의 풍수적 목적에서 쌓았으리라는 추정이 가장 유력하다.
일부에서는 이 탑들을 이갑룡(李甲龍)[1860~1957] 혼자서 축지법을 이용하여 쌓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과학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인정하기는 어렵다. 또 축지법은 빨리 가는 방법이지 축탑(築塔)하는 일과는 무관하다. 또 이갑룡 혼자서 1톤이 넘는 돌들을 들어 올려 쌓을 수는 없었을 것이므로 이갑룡의 축탑 가능성은 배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왕조 차원의 비보 탑(裨補塔)이라는 주장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이다. 만약 왕조 차원의 비보 탑이라고 한다면 천지탑의 조성 연대는 고려 때일 가능성도 있고, 늦어도 조선 왕조 성립기 이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 왕조의 한양 천도 후에는 전 왕조에 걸쳐 달리 천도 논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탑들을 조선 태조 이성계가 축탑했다는 사실을 암시한 시가 있다. 1924년에 발행된 『진안지』에 조선 태조가 지었다는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천마동내세이궁(天馬東來勢已窮)[천마(天馬)가 동토로 와 그 세가 이미 궁했구나]/ 상제미섭궐도중(霜蹄未涉蹶途中)[준마의 말발굽 다 가지도 못하고 도중에 쓰러졌네]/ 연인매골류기이(涓人買骨留其耳)[연인(涓人)이 그 몸체는 사 가고 두 귀만 남겨 놓아]/ 화작쌍봉흘반공(化作雙峰屹半空)[쌍봉을 이루고 하늘에 우뚝 솟아 있네]
이 시의 뜻을 풀어 보면 이상하기 그지없다. 이상하다는 것은 시에 있어서 보통의 경우 자연 경관을 두고 세가 궁하다는 등 쓰러졌다는 등 하는 상서롭지 못한 표현을 쓰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도 ‘쌍봉을 이루고 하늘에 우뚝 솟아있는’ 웅장한 산이라는 것을 묘사하면서도 마이산의 형국을 ‘기진맥진하여 쓰러지고 만 천마’로 표현한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에 마이산이 조선 초기의 국도(國都) 풍수 사상과 연결된 실마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진안 지역에는 마이산과 관련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설화가 몇 가지 전하고 있다. 꿈에 신인(神人)으로부터 금척(金尺)을 받고, ‘장차 이 강토를 재라’는 현몽을 얻은 곳이 마이산이라거나 마이산을 속금산(束金山)이라 명명(命名)한 사람도 이성계라는 설화 등이다. 이런 설화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 관찬 기록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전혀 근거가 없다고는 단정하기 어렵다. 위의 시도 태조가 직접 지은 것이 아닌 건 분명하지만[어느 기록에도 없다] 태조와 마이산 관계를 파악한 누군가가 태조의 이름을 빌려 그 사실을 암시한 것 같다. 이 시의 뜻을 바꿔서 풀어 보면 다음과 같다.
천마동래세이궁(天馬東萊勢已窮)[서방의 금(金) 기운 동방으로 와 세가 스러졌네]/ 상제미섭궐도중(霜蹄未涉蹶途中)[강한 힘 뻗지 못하고 잦아들고 말았구나]/ 연인매골유기이(涓人買骨遺其耳)[궁중에서 온 사람들 속금(束金)의 조치를 취하니]/ 화작쌍봉흘반공(化作雙峰屹半空)[하릴없이 쌍봉만 허공중에 우뚝하구나]
이를 설명하면 ‘오행에서 서방은 금행이고, 색깔로는 백색이다. 따라서 천마는 서쪽을 나타낸다. 이 천마가 동쪽으로 와 힘이 약해진다. 여기에 궁중에서 사람을 보내 남은 금 기운까지를 묶어두는 조치를 취한다.’는 것이 이 시의 요지이다. 이 시를 보면 앞서 『성호사설』에서 언급한 ‘신도 한도(新都漢都)’의 의미가 다시 상기된다. 즉 ‘금강은 반궁수(反弓水)형으로 송도 뿐만 아니라 한양까지를 겨누는 형국’이니 마이산에서 계룡산에 이르는 산맥은 ‘화살’인 셈이다. 화살에서 화살촉은 금속이다. 화살에서 화살촉을 빼버리면 무용지물이니 마이산에 금(金)을 묶는[속금(束金)] 비보(裨補) 조치를 했다는 것이 이 시에 함축된 뜻인 것이다. 이 시의 실제 작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마이산 탑의 조성 경위를 꿰뚫어본 내공 깊은 풍수가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상의 정황을 종합할 때 마이산 탑들은 조선 초 한양 천도 당시 여러 풍수설을 감안하여 반궁수의 흉국(凶局)을 비보하기 위한 비보 탑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수백 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조탑 시기]
마이산 탑을 쌓은 사람은 이갑룡(李甲龍)[1860~1957] 처사로만 알려져 왔으나 여기에는 허점이 많다. 인근 지역 고로(古老)들에 의하면 이갑룡 이전에도 탑이 존재했다는 전문(傳聞)이나 기록들은 이갑룡이 초기 축탑자가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알려주고 있고,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이 탑들 가운데 일부는 결코 혼자서는 쌓을 수 없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갑룡이 축탑자에서 배제된다는 뜻은 아니다.
이갑룡이 초기의 축탑자는 아닐망정 이곳에 정착한 이래 끊임없이 새로운 탑을 쌓고 무너진 탑을 보수하며 일생을 살아간 것은 누구나 동의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천지탑과 일부의 탑들은 전술한 대로 이갑룡이 탑을 조성한 목적과는 차원이 다른 비보 등의 목적으로 쌓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과 그 축탑 시기도 훨씬 선행한다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어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이산 탑에 대하여 예전부터 탑이 있어 왔다는 구전과 기록이 상당수 있다. 이갑룡과 동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이갑룡이 마이산에 들어오기 이전에도 그 자리에 탑이 있었다고 구술했다는 전언이 있으며, “천지탑 부근은 숲이 너무 우거져 대낮에도 컴컴해서 무서워 접근도 하지 못하였고 그래서 숲 속에 무엇이 있는지도 몰랐고, 몇 년 뒤 타관으로 일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천지탑이 드러나 있었다”고 구술한 사람도 있었다.
1928년에 송도성이 쓴 「마이산 행감(馬耳山行感)」이라는 기행문에는 천지탑을 본 사실을 “수백인(數百人)도 운반(運搬)하지 못할 거석(巨石)을 들어서 탑(塔)의 중층(中層)을 조성(造成)하였다는 말”, “보기만 하여도 정신(精神)이 어지러울 마이산(馬耳山) 중층(中層)에 가서 조탑(造塔)한 사실(事實)과 거석(巨石)을 운반(運搬)하야 탑(塔)의 중층(中層)을 구성(構成)한 증거(證據)는 목전(目前)에 나타난다.” 등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당시까지는 탑의 중층(中層)까지만 보이고 상륜부는 아직 없다는 뜻이고, 수백 인도 못 들 거석을 혼자서 운반하여 축탑하였다는 말로 그때나 지금이나 수긍할 수 없는 말이다. 이상을 종합하면 당시의 상황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마이산 탑사 부근은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그래서 수풀이 우거졌다. 둘째, 수풀 속에 천지탑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이 있었다. 셋째 이갑룡이 들어와 1910년경 아래쪽 탑들을 손보거나 쌓기도 하고 이후 천지탑을 덮은 수풀들을 제거하여 천지탑을 드러내 놓았다. 넷째, 그러나 1928년까지는 아직 천지탑의 상륜부는 아직 만들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또 이 탑들이 이갑룡 처사보다 선행(先行)한다는 보다 구체적인 증거가 있다. 하립(河氵昱)[1769~1831]이라는 이 지역 문인이 쓴 『담락당운집(湛樂堂韻集)』에는 마이산 속에 탑이 여럿[重重] 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그 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금당사우음중씨(金堂寺遇吟仲氏)[금당사(金塘寺)에서 중형(仲兄)과 읊다]」
속금산리탑중중(束金山裡塔重重)[속금산(束金山) 속에 탑이 줄줄이 서 있는데]/ 홍수음중청만종(紅樹陰中聽晩鍾)[단풍나무 숲 속에서 저녁 종소리 듣네]/ 고사유간금불상(古寺唯看金佛像)[오래된 절이라 볼 것은 오로지 금불상뿐]/ 암위부도속인축(岩危不到俗人筑)[바윗길 험하여 세간 사람 발길 없네]/ 세심화우삼천계(洗心花雨三千界)[마음 씻고 보니 삼천계에 꽃비가 가득]/ 빙목운하제일봉(聘目雲霞第一峯)[눈을 드니 구름 노을 제일봉에 감도네]/ 백납위언진경호(白衲爲言眞景好)[진경(眞景)이라고 자랑하는 늙은 스님 말을 듣고]/ 산행진일멱선종(山行盡日覓仙踪)[신선의 자취 찾아 온종일 산속을 헤맸네]
이갑룡보다 90여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마이산 속에 탑이 여러 개 있다는 사실을 기록했으니 그 탑들은 어디에 어떤 형태로 있었을까? 앞서 기술한 바대로 불탑(佛塔)은 대개 사리탑으로 하나의 사찰에 여러 개를 조성하는 사례가 없으니 금당사 등 사찰에 있는 탑을 가리킨 건 아닐 것이다. 또한 탑이라면 당시 전부 석탑이었으니 당시에 탑이 있었다면 지금도 마이산 어디엔가 흔적이라도 남아 있어야 함이 당연하다. 따라서 그 탑들은 바로 현재의 마이산 탑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즉 마이산 탑이 이갑룡 처사가 축탑한 시기보다 적어도 90년 전에도 존재했다는 증거이다.
[축탑 방식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마이산 적석탑[천지탑]의 축탑 방식은 ‘막돌 허튼층쌓기’라고 하는데 이런 양식은 예로부터 성곽이나 돌담, 누석단, 방사탑 등에서도 두루 보이고 있으므로 마이산 탑의 축조 기법은 특별히 독창적이거나 특별한 문화적 매개(媒介)를 통해 유입된 방법이 아니며, 이 장소에 널려 있는 자연석들을 이용하여 탑을 쌓고자 의도했을 경우 자연스럽게 도입될 수밖에 없는 기법이었을 것이다. 다만 치밀한 구성과 튼튼한 결구(結構)로 보아 축탑 전문가의 지휘 아래 상당수의 인력이 동원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천지탑의 원형은 현재의 천지탑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을까. 현재의 천지탑은 탑신부 위에 뾰족하게 상륜부를 만들어 넓적한 돌을 다듬어 판석으로 하고 각 판석 사이에는 작은 돌들을 끼워 넣어 흔들림이 없도록 처리되어 있다. 이 상륜부는 무너져 있던 것을 1930년대에 다시 쌓았다고 탑사 측은 주장하고 있으나 천지탑의 원형에 상륜부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상륜부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쌓는 것이고 더구나 천지탑은 비보 탑이므로 상륜부를 쌓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지탑의 원형에는 상륜부가 없었고, 이갑룡 처사가 1930년대 이후에 치성객[관광객]들에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하여 추가하여 쌓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당초의 천지탑에는 첨탑 부분이 없었고, 1930년대에 ‘무너진’ 것을 다시 쌓은 게 아니라 ‘당초에 없던’ 것을 새로 쌓은 것으로 봐야 한다.
[이갑룡이 초기 축탑자인가?]
이상 살펴본 바 천지탑의 원형은 이갑룡 처사가 마이산에 거주하기 이전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이곳에 정착한 이갑룡 처사가 이곳을 찾는 치성객들이나 관광객들에게 보여줄 거리를 좀 더 제공하기 위하여[관광 상품화하기 위하여] 본래 상륜부가 없던 천지탑 등 원뿔형 석탑에 1930년대 이후 상륜부를 새로 쌓아 올린 사실은 모든 정황을 종합할 때 분명하다고 하겠다.
마이산 탑사 경내의 비석과 안내판에 의하면 이갑룡은 본관이 전주, 효령대군의 15세 손으로 전라북도 임실군 둔남면 둔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명산을 찾아 수도하던 중 난세와 억조창생을 구원하려면 공을 들여야 한다는 신의 계시와 깨달음으로 솔잎을 생식하며 천지 음양 이치와 팔진 도법으로 1885년부터 30여 년간에 걸쳐 마이산을 비롯 정읍 신태인의 백산사 등에 탑을 쌓고 일생을 기도로 살았고 신의 계시로 쓴 30여 권의 신서와 부적을 남겨 놓았다고 한다.
더 부연하자면 이갑룡은 마이산에 대하여 매우 익숙하여 지금도 전문 산악인인 장비를 동원하지 않으면 등반을 엄두도 못내는 동봉을 맨몸으로 수월하게 오르내렸다고 하며, 갖가지 신이한 행동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에게 따라붙는 호칭이 벼슬하지 않은 선비를 가리키는 처사(處士)라는 점에서 그가 특별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추정된다. 어쨌든 이갑룡은 마이산에 들어온 이래 전래하던 탑에 뾰족하게 상륜부를 증축하거나 새로운 외줄 탑을 쌓는 등 조탑 활동을 하였다.
이에 대해 탑사 측에서는 다른 축탑설을 부정하고 오직 이갑룡 축탑설 만을 주장한다. 사실 이 문제는 매우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즉 천지탑을 비롯한 몇 기의 탑신은 이갑룡 처사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으나 일반인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숲 속에 묻혀 있었다가 이갑룡 처사가 이를 보수하고 상륜부를 새로 쌓고 외줄탑 등 새로운 탑을 많이 만들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선행 탑과 이갑룡 처사가 증축하거나 신축한 탑의 인과 관계만 설명하면 명료할 것을 선행 탑들마저 이갑룡 처사의 작품으로 이야기하다보니 혼란이 일어난 것이다.
[팔진도와 마이산 탑]
마이산 탑 경내의 탑들이 천지 음양 이치와 팔진 도법(八陣圖法)으로 축조하였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천지 음양이치라는 말은 천지탑의 형태가 음양처럼 보이기도 하여 후에 오행을 상징하는 오방탑을 쌓고 천지 음양 이치라 부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탑들의 배열은 진법(陣法)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특기할 만한 부분은 이갑룡 처사가 탑을 팔진 도법에 의하여 축탑했다고 했는데 이 팔진도는 『삼국지(三國志)』에서 제갈공명이 석진(石陣)으로 팔진도를 만들어 훗날 위나라 군사를 혼내 주었다는 데에서 유명하지만 마이산 탑들은 팔진도의 배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본래 진법이란 지휘부를 중심으로 한 전투 대형을 말하는 것이다. 공격형 진법도 있고, 수비형 진법도 있는가 하면 이 둘을 겸하는 진법도 있다. 천변만화(千變萬化) 하는 상황에 따라 임기응변하는 것이 진법의 요체인 것이다.
따라서 석탑으로 진을 쌓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으로 『삼국지』 같은 소설에서나 있음직한 얘기이다. 더구나 대장격인 천지탑을 옹호해 주어야 할 탑들은 저 아래 동떨어져 쌓여 있다. 그러니 탑을 팔진 도법에 의하여 축탑한 것이 아니라 당시가 제갈공명이 팔진 도법으로 둔갑(遁甲)하는 술법을 썼다는 얘기가 널리 회자되었던 시절이라 그 얘기를 빌려와 탑의 배치를 설명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돌탑이 있어 이름도 탑사(塔寺)]
탑사(塔寺)는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8번지 마이산 서봉의 직립한 절벽 아래에 위치한 태고 종단에 소속된 전통 사찰로 마이산의 신비한 돌탑 속에 자리하고 있다. 사찰은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마이산 석탑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1920년경 이갑룡 처사가 마이산에 들어와 초가 암자를 짓고 거주하면서 돌 미륵불을 안치하고 불공을 드리기 시작하여 1935년경에는 목조 함석지붕 단층 주택으로 개축하고 부처님을 봉안하였다.
그러나 이갑룡은 처사(處士)라고 불리는 것처럼 승려 행세를 하지 않았고, 따라서 절 이름도 없었다. 다만 편의상 돌탑이 있다 해서 탑사라 불려왔다. 그 후 이갑룡의 손자인 이왕선(李旺善)이 한국 불교 태고종에 사찰 등록을 하였고, ‘한국 불교 태고종 탑사’로 절의 이름이 정해졌다. 당우(堂宇)는 1986년 전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인 대웅전을 완공하였다. 대웅전 동편 위에 산신각이 있다. 이후 나한전과 동양 최대의 법고라는 북을 소장한 종각과 관리사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