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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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强占期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혜영 |
[정의]
1910년에서 1945년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전라북도 진안 지역의 역사.
[개설]
일제는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이후 민족 말살 정책과 식민지 수탈 정책을 융합한 식민 정책을 추진하였다. 진안 지역에서는 일제의 가혹한 통치와 수탈에 저항하여 3·1 운동에 동참하였고, 이후에도 다양한 농촌 계몽 운동이 전개되었다.
[진안 지역의 경제]
일제 강점기 진안 지역의 경제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지만 당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농업이 중심이었을 것이다. 1925년에 간행된 『진안지』에 따르면 1924년에 쌀 8만 2779석·보리 6,786석·밀 2,047석·콩 1만 1098석·팥 3,600석·밤 923석·기장 167석·수수 343석·옥수수 27석·메밀 872석·깨 71석·고구마 2만 3790관·감자 12만 3527관·무 18만 9080관·배추 8만 9909관·오이 1만 860관·면화 1만 9642근·대마 3만 6070관·닥 껍질 2만 3973관·왕골 1만 1248관·잠견 557섬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진안 지역은 산간 지대에 해당하므로 전라북도의 다른 평야 지역에 비해 쌀의 생산량이 적은 편이었다.
[진안 지역의 교육 기관]
진안 지역의 근대식 교육 기관으로 1911년에 진안 공립 보통학교가, 1912년에 용담 공립 보통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일본인을 위해서 1914년에 진안 공립 심상 소학교가 진안면에 설립되었다. 이후 마령면[1918년]·정천면[1922년]·주천면[1923년]·안천면[1925년]·백운면[1927년]·부귀면[1928년]·동향면[1930년] 등에도 각각 공립 보통학교가 설립되었고, 이외에도 부녀자를 위한 야학이 개설되었다.
[진안 지역의 3·1 운동]
진안읍의 장날이었던 1919년 3월 25일 오전에 수백 명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자 장꾼들도 여기에 합세하였다. 주천면 주양리에서는 유지 김주한 등이 만세 운동을 계획하여 사립 화동 학교[지금의 주천 초등학교] 학생 및 주민들과 함께 4월 3일 오후 4시 무렵 화동 학교의 운동장에서 만세를 외친 후 자진 해산하였다. 또한 그날 밤 10시 무렵에도 주민과 학생 60여 명이 다시 마을 앞에 모여 횃불을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4월 6일에는 마령면 평지리 뒷산에서 주민 수백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으나 헌병에게 제지당하였다. 4월 12일에는 성수면 도통리에서, 다음날에는 마령면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는데 특히 13일은 마령면의 장날이었으므로 미리 운동을 계획하였던 오기열·전영상 등에 의해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진안 지역의 인사들은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만세 운동 등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