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524
한자 三一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주천면 주양리|마령면 평지리|성수면 도통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25일 - 진안읍에서 독립 만세 운동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3일 - 주천면 독립 만세 운동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6일 - 마령면 평지리 뒷산에서 독립 만세 운동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12일 - 성수면 도통리에서 독립 만세 운동 발생
전개 시기/일시 1919년 4월 13일 - 마령면에서 독립 만세 운동 발생
성격 독립 만세 운동
관련 인물/단체 오기열|이성녀|김주한|양해관|전영상|김귀영|황해주|화동 학교

[정의]

1919년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3월 25일~4월 중순까지 진안 지역에서 일어난 항일 독립 만세 운동.

[개설]

진안 지역의 만세 운동은 3월 25일의 진안읍 장날부터 시작되었고 이후 주천면·마령면·성수면 등으로 이어졌다. 만세 운동이 끝난 후에도 그 영향을 받은 지역민들 다수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역사적 배경]

일본은 1910년에 국권을 강탈한 후 폭압적인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우리 민족은 무단 통치 아래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당하였고 교육의 기회마저 얻지 못하였다. 토지 조사 사업으로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였으며 노동자도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크게 차별을 받았다. 이로 인해 일본에 대한 저항이 심화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민족 운동이 전개되었다. 해외에서는 독립군 기지를 마련하고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으며 국내에서는 비밀 결사 운동, 교육 문화 운동, 생존권 수호 투쟁 등이 전개되었다. 그 무렵 고종이 사망하자 이를 계기로 국내에서 거족적인 만세 운동이 계획되었다.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명이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였고 탑골 공원에서는 군중들이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만세 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졌고 진안 지역에서도 거족적인 민족 독립 운동 소식을 접한 직후 만세 운동에 동참하였다.

[경과]

진안 지역에는 3월 초에 만세 시위 소식이 전해졌다. 오기열은 3월 6일에 이성녀의 집에서 3·1 운동 관련 문서 3통을 작성하여 마령면 평지리에 부착하는 등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3월 25일 진안읍의 장날에 만세 운동이 일어났는데 오전에 수백 명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대열을 이루어 행진하자 장꾼들도 합세하였다.

4월 3일에는 주천면 주양리에서 주민과 학생들이 만세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주양리에는 화동 학교[지금의 주천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유지 김주한 등이 만세 운동을 계획하여 화동 학교 학생인 양해관 등에게 동참을 권유하였다. 4월 3일 오후 4시 무렵에 주민과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친 후 자진 해산하였고 그날 밤 10시 무렵에 주민과 학생 60여 명이 마을 앞에 다시 모여 횃불을 들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4월 6일에는 마령면 평지리 뒷산에서 오기열·전영상·김귀영·황해주 등이 주도하여 주민 수백 명이 모여 만세를 불렀으나 헌병에 의해 제지당하였다. 4월 12일에는 성수면 도통리에서, 다음 날에는 마령면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는데 특히 13일은 마령 지역의 장날이었기 때문에 미리 운동을 계획하였던 오기열·전영상 등에 의해 운동이 크게 확대되었다. 마령면에서의 만세 운동 이후에도 진안 지역의 인사들은 계속 운동을 계획하며 독립을 위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결과]

진안 지역에서는 만세 운동과 관련하여 오기열·전영상·황해수 등 여러 사람들이 투옥되었다. 그러나 만세 운동이 끝난 후에도 그 영향을 받은 지역민들 다수가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중 주천면김영필 등은 『대한 민보』·『독립 신문』 등 독립 운동 관계 문서를 배포하면서 독립 운동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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