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5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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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現代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호 |
[정의]
1945년 해방 이후 전라북도 진안 지역의 역사.
[개설]
진안군은 전라북도의 동부 산악 지역에 있어서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지주들의 수탈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다고 이해되었다. 그러나 비록 거대 지주들은 아니지만 상당수의 중소 지주들이 진안군의 토지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1943년에 조선 총독부는 진안군에 4개의 저수지[반월제·포강제·월포제·신기제]를 한꺼번에 축조하여, 전쟁 중에도 쌀 증산을 위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수립된 용담댐 건설 계획은 용담면을 비롯한 진안군 7개 면의 현대사에 아픈 경험을 남겼다. 1939년 조선 총독부는 용담댐 건설 계획을 수립하고, 수몰 예정지인 진안군 7개 면의 토지를 강제로 수용하였다. 이로 인해서 용담·정천·상전·주천·안천·진안·동향면 등 수몰 예정지 주민들은 토지를 조선 전업 주식회사에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였다. 해방 이후 농지 분배 과정에서 이 토지는 국가 기간 산업 용지라는 명분으로 분배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로 인해서 진안군 7개 면 농민들은 1950년대까지도 소작료를 납부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이 지역 농민들은 1948년부터 이 농지의 분배를 요구하다가 1950년대에 대책 위원회를 구성하고 소작료 불납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소송을 제기하였다. 농민들은 이 소송에서 승소하여 1960년 농지를 분배받게 되었고, 1968년 상환을 완료함으로써 비로소 소작농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주로 일본인 지주들의 혹독한 수탈에 저항하여 벌이던 농민의 소작 쟁의가 진안군에서는 1950년대까지 계속되었던 것이다.
용담댐 건설 계획은 이후에도 진안군 주민들과 마찰을 빚었다. 1966년에 용담댐 건설이 국가 정책으로 검토되고 지질 조사를 시작하자, 주민들은 1978년 대청댐 건설 계획이 확정되면서 용담댐 건설 계획이 국가 계획에서 제외될 때까지 대책 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대책 마련에 부심해야 했다. 그로부터 약 20년 후인 1987년에 다시 ‘전라북도 장기 종합 개발 계획’에서 용담댐 건설 계획이 부활하였다. 1991년에 댐 기본 계획이 공고되고 1992년에는 용담 다목적댐 실시 계획이 승인되는 동안 주민들은 1989년부터 투쟁 위원회를 구성하여 용담댐 건설 저지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용담댐은 1990년에 착공되어 2001년에 완공되었고, 용담댐 주변 6개 읍·면 64개 마을이 수몰되면서 주민들은 타지로 이주해야 했다.
[진안군 행정 구역 개편 과정]
진안군은 조선 초기인 1413년(태종 13) 진안현으로 개칭된 이후 조선 말기까지 유지되다가, 1895년(고종 32)에 진안군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96년에는 남원부 진안군이 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 용담군과 합병하여 오늘날의 진안군이 되었으며, 이때 진안·동향·마령·백운·부귀·상전·성수·안천·용담·정천·주천 등 11개 면을 관할하는 현재 행정 구역의 틀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행정 구역은 큰 변화 없이 유지되다가 1979년 5월 1일에 진안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진안군의 행정 구역은 1읍 10면이 되었다. 1983년 2월 15일에 대통령령에 의해 마령면 연장리가 진안읍으로, 정천면 구룡리는 상전면으로 편입되었다. 1987년에 상전면 운산리를 진안읍에, 정천면 용평리를 상전면에 편입시키는 행정 구역 개편이 이루어졌다. 1994년 12월 26일에는 동향면 신송리 일부 지역이 장수군으로 편입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11개의 읍과 면, 77개의 법정리, 303개의 행정리로 구성된 현재의 행정 구역이 완성되었다.
[한국 전쟁과 진안군]
한국 전쟁이 발발한 후 북한군이 진안군에 들어온 것은 7월 22일 무렵이었다. 북한군은 금강-대전-영동-무주를 거쳐서 진안으로 들어왔는데, 약 2개월 동안 진안군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통치하였다. 북한군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인민 위원회를 조직하고 행정을 통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우익 세력이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한편 운장산을 중심으로 진안군의 우익 청년들이 조직한 비밀 결사대는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까지 범위를 넓혀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수복 이후 군경과 협력하면서 팔공산·지리산 일대까지 진출하였다.
진안군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전쟁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다. 전쟁 중 민간인 피해가 극심했던 지역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에 지주와 소작의 관계가 대립적이었거나, 해방 직후 이념 갈등이 심했던 지역들이었다. 진안군은 신분제나 대지주의 수탈이 심하지 않았고, 산간 지역이었으므로 이념 분쟁에도 휘말리지 않아 전쟁에서 심각한 민간인 피해를 겪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수복 이후 토벌 과정에서 토벌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가 백운면 등 산촌 지역에서 나타나기도 하였다.
진안군은 한국 전쟁과 관련해서 그다지 주목받는 지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 초기 미군 제24사단장인 윌리엄 딘(William F. Dean) 소장이 진안군 상전면에서 북한군에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유명해졌다. 이는 미군 전쟁사에서 사단장급 장군이 적의 포로가 된 초유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 7월 20일 대전 전투에서 패하고 후퇴하던 딘 소장은 금산 부근에서 낙오하여 산속을 헤매다가, 무주군 적상면 방이리에 살던 박종구 등의 도움을 받으며 1개월 이상 홀로 남하해서 진안군 안천면에 이르렀다. 그러나 딘 소장은 도움을 청하였던 한두규의 밀고로 8월 25일에 진안군 상전면 운산리[지금의 진안읍]에서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경제 개발과 진안군]
1960년대 중반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된 한국의 근대화 정책은 농업과 농촌 사회 및 농민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난 40년 동안 한국의 농업은 지속적으로 쇠퇴하였으며, 농촌 인구의 대부분이 도시로 이주하였다. 진안군의 인구는 1966년에 약 10만 2500명에 달했으나 그 이후 계속 감소하여 1969년에는 10만 명 이하로 떨어졌고, 1980년 이후에는 7만 명으로 감소하였다. 1996년에는 4만 명 미만으로 줄어들었고, 2006년에는 2만 7천 명을 기록하였다. 40년 동안 진안군의 인구가 약 1/4로 줄어든 셈이다.
인구의 절대적인 감소만이 아니라 인구 구조에서도 진안군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 인구의 비중을 나타내는 인구 고령화율이 2008년에 26.8%를 기록함으로써, 진안군은 이미 초고령화 단계에 들어섰고 출산율도 계속 떨어지고 있다. 현재 진안 지역에서는 인구 감소와 인구 구조의 변화로 인한 농업 노동력의 절대 부족으로 농업 생산성이 하락하고 농업 작물과 농사 방식에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또한 출산율 저하로 인해 차세대 노동 인구 확보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진안군은 2000년대 이후 농촌 붕괴와 농업 해체 위기에 직면해서 이를 타개하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농촌 사회의 재활성화를 위한 귀농 정책과 마을 간사 제도를 통한 마을 만들기 등의 지역 활성화 정책뿐만 아니라, 홍삼·고추·버섯·흑돼지·한과 등의 특산물과 특화 작물의 재배와 가공 및 시장 개장과 다양한 홍보 전략의 활용 등을 통해 지역 농업의 부활에 노력하고 있다. 한국의 농업과 농촌 사회가 직면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진안군의 현재 과제라면, 사람들이 모이는 농촌을 다시 만드는 것이 진안군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