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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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六二五戰爭 |
이칭/별칭 | 한국 전쟁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호 |
[정의]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북한의 남침으로 전라북도 진안 지역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역사적 배경]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한국 전쟁이 발발한 후 진안 지역에 북한군이 들어온 것은 7월 22일 무렵이었다. 이날 대전·영동·무주를 거쳐서 덕유산 일대에 집결한 북한군 2개 중대 병력이 진안군을 습격하자 경찰 병력은 장수로 철수하였다. 미군 제24사단 38연대가 9월 28일에 진안 지역으로 들어왔으므로 북한군이 실질적으로 진안 지역을 지배한 기간은 2개월에 불과하였다. 북한군이 점령한 동안 진안 지역에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인민재판이나 학살이 적은 편이었다.
[경과]
진안군은 한국 전쟁 당시 미군 제24사단장 윌리엄 딘(William F. Dean) 소장이 북한군에 포로로 잡힌 사건으로 유명하다. 1950년 7월 20일 대전 전투에서 패하고 후퇴하던 딘 소장은 금산 부근에서 낙오하여 산속을 헤매다가, 무주군 적상면 방이리에 사는 박종구 등의 도움을 받으며 1개월 이상 홀로 남하해서 진안군 안천면에 이르렀다. 그러나 딘 소장은 도움을 청하였던 한두규의 밀고로 8월 25일에 진안군 상전면 운산리[지금의 진안읍]에서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한두규는 1953년 경찰에 체포되어 1954년 9월 23일에 서울 지법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교도소에서 복역하다 1957년 5월 21일에 좌익수 전향자로 감형되어 출소하였다]. 이 사건은 미군의 역사에서 사단장급 장군이 포로가 된 초유의 사건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진안 지역에서 전쟁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전쟁 중 좌·우 양측에서 적지 않은 사상자들이 발생하였다. 경찰은 7월 20일에 퇴각하기 직전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던 예비 검속자 30여 명을 백운면 신암리에서 처형하였다. 북한군이 진안군을 장악하자 진안군 인민 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인민 위원장은 진안면 단양리 출신의 김병철이 맡았다. 또 자치 경찰 성격의 자위대를 조직하고, 대장에는 진안면 구룡리 출신의 전금생을 임명하였다. 인민 위원회는 7~9월 사이에 부귀면 황금리·궁항리 등 운장산 일대에서 우익 세력에 대한 탄압과 처형을 자행했다고 한다. 북한군은 9월 20일에 퇴각하면서 유치장에 구금시켰던 우익 인사 38명을 진안읍 군하리 강경골재에서 처형하였고 후퇴하던 중에도 부귀면 궁항리에서 많은 주민을 학살하였다.
진안 지역에 남아 있던 우익 청년 40여 명은 진안군 부귀면 수항리 손시골에서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여 북한군에 대항하였다. 비밀 결사대는 북한군이 진안 지역을 지배하던 8~9월 사이에 운장산 일대를 중심으로 북한군을 상대로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며, 주천면 대불리와 완주군 동상면 일대까지 활동 영역을 확장하였다. 비밀 결사대는 진안 지역의 수복 이후 군경과 합동으로 공비 토벌 작전에 참가하여 백운면 백암리·부귀면 궁항리·주천면 대불리 등에서 활동하였으며, 임실군 갈담면·회문산 일대까지 진출하여 국군의 지리산 토벌 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결과]
1953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후에도 진안 지역은 국군의 빨치산 토벌 작전 기간 동안 피해가 적지 않았다. 백운면 대전 마을은 전쟁 전에 선각산 아래에 20여 호가 모여 살던 산촌 마을이었다. 1951년 음력 2월 9일에 이 마을에 온 빨치산들이 주민 3명을 납치·살해했는데, 다음날 빨치산의 움직임을 파악한 경찰과 민간 토벌대[5007부대로 알려져 있다.]가 마을을 수색하다가 빨치산의 공격에 피해를 입자 빨치산의 은신처라며 마을 전체를 소각시켜 버렸다. 대전 마을 주민들은 빈손으로 마을에서 쫓겨나 인근 반송리에서 피난살이를 해야 했다.
진안 지역에서는 전쟁 중 좌·우 세력에 의해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사례가 적지 않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대량 학살의 피해는 입지 않았으므로 지역 사회에서 발생했던 좌·우 세력의 갈등도 비교적 큰 후유증을 남기지 않고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