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0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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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弓項里上弓項陶窯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궁항리 360-2 전|궁항리 355 전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성준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6년 - 궁항리 상궁항 도요지 전주 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 조사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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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궁항리 상궁항 도요지 -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궁항리 360-2전 |
소재지 | 궁항리 상궁항 도요지 -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궁항리 355전 |
성격 | 가마터|백자 가마 유적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궁항리에 있는 조선 시대 가마터.
[개설]
궁항리 상궁항 도요지는 조선 시대 백자를 생산하였던 가마터로 2개소가 존재한다. 이를 상궁항 도요지 A, 상궁항 도요지 B로 지칭한다.
[변천]
궁항리 상궁항 도요지에 대한 기록이나 문헌은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요지에서 확인되는 유물의 양상을 통해 17세기에서 18세기 대에 요업 활동이 활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도요지와 관련하여 주목할 점은 마을 북쪽 산기슭에 위치한 정수암 터이다. 이 사찰의 정확한 유래와 창건 연대는 확인할 수 없지만 6·25 전쟁 때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정수암 터에 새롭게 사찰이 세워져 있어 확인할 수 없으나, 『문화 유적 분포 지도』 제작을 위한 2006년의 지표 조사에서 이곳에 3개의 축대가 남아 있었고 주변에는 수파문 계통의 기와 조각들이 산재해 있음이 확인되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조선 시대에는 정수암에서 흘러 내려 온 쌀뜨물이 정자천을 덮었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그처럼 큰 규모의 사찰이었다면 많은 양의 반상기들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이므로 궁항리 일대의 도요지는 정수암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위치]
궁항리 상궁항 도요지는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궁항리 360-2전과 궁항리 355전에 있다. 전주에서 진안 방향의 국도 26호선을 따라 가다보면 봉암 교차로가 나오고, 이곳에서 궁항리 방향으로 약 3.5㎞ 정도 올라가면 상궁항 마을이 나온다. 상궁항 도요지는 이 마을 남쪽 중고개골에 위치한다. 이 중 상궁항 도요지 A는 중고개골 입구 북쪽 일대 산의 경사면에 분포하며, 상궁항 도요지 B는 상궁항 도요지 A에서 남쪽으로 약 30m 정도 떨어진 밭에서 확인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궁항리 상궁항 도요지는 전주 대학교 박물관에서 『문화 유적 분포 지도』를 제작하기 위한 2006년의 지표 조사 중 발견한 유적으로 정식 발굴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황]
궁항리 상궁항 도요지 A가 위치한 곳에는 5기 내지 6기의 민묘들이 분포하고 있었으며, 그 주변으로는 백자 조각과 요벽체 및 요도구 등이 산재해 있었다. 따라서 민묘를 조성하는 당시에 가마도 훼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13년에는 도요지 부근에 주택이 조성되면서 민묘가 이장되고, 원 지형도 삭평되어 가마터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궁항리 상궁항 도요지 B는 상궁항 도요지 A에서 남쪽으로 약 30m 지점에 있다. 이곳 역시 오랜 경작으로 인하여 가마터는 대부분 훼손되었고 유물도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그나마 현재 확인된 유물은 17세기에서 18세기에 제작된 백자 조각들로 기종은 발·접시·잔 등이 소량 발견되었고, 굵은 모래를 받쳐 포개 구이를 하였다. 그 밖에 요벽체와 지름 10㎝ 이상의 원반형 도지미 등도 확인된다.
[의의와 평가]
궁항리 일대의 도요지들은 정자천을 끼고 동쪽과 서쪽 일대에 분포한다. 특히 궁항리 일대는 산악 지대가 발달되어 숲이 울창하다. 따라서 가마를 운영하기 위한 땔감을 공급하는데 있어서 천혜의 자연 조건을 지닌 곳이다. 또한 정자천을 끼고 있어 자기의 운송이 편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자천은 부귀면 궁항리 운장산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봉암리·거석리·수항리·황금리·두남리를 지나 정천면 월평리와 갈용리·모정리 등을 거쳐 금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궁항리 일대의 도요지에서 확인되는 백자들은 모두 제작 기법이 동일하다. 따라서 이 곳의 백자 가마들은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운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관요의 백자 제작이 차질을 빚고, 금속의 부족으로 인해 백자 수요가 증대하여 민간에서의 백자 제작이 확대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또한 17세기 이후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과 상품 유통의 증대도 민간에서의 백자 제작을 가속화시켰다. 궁항리 일대에서의 백자 제작은 이와 같은 시대상을 반영하는 가마터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