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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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克禮 |
이칭/별칭 | 낭헌(浪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가림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병남 |
거주|이주지 | 전극례 낙향지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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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단소 | 전극례 묘소 -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산주 마을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천안(天安) |
대표 관직 | 호조 판서 겸 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
[정의]
조선 전기 진안으로 낙향한 문신.
[개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여 진안으로 낙향하였다.
[가계]
본관은 천안(天安). 호는 낭헌(浪軒). 형조 판서를 지낸 문평공(文平公) 도은(都隱) 전문식(全文軾)의 증손으로 판중추부사 전사미(全思美)의 아들이다.
[활동 사항]
전극례(全克禮)[?~?]는 『진안지』에 의하면 ‘어려서부터 용모가 뛰어나고 재주가 비상했을 뿐 아니라 도량이 넓고 문장이 장하여 당시에 이름난 재상 황희(黃喜), 허조(許稠) 등과도 사귀었다.’고 한다.
세종 때에 정시에 올라 승문원 정자, 사헌부 정언, 호조 참판, 공조 참판, 형조 참판등을 거쳐 호조 판서 겸 경연춘추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이르렀다.
1455년(단종 3) 어린 임금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창덕궁으로 옮기니, 벼슬을 버리고 백악산 조용한 곳에 가서 시사를 한탄하며 숨어 있다가 곧 이어 가족을 이끌고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로 내려와 증조할아버지인 문평공 전문식(全文軾)의 유훈을 받들며 은거하게 되었다. 스스로 ‘낭헌’이라 자호하고 산 높고 물 맑은 월랑의 자연에 묻혀 하늘을 뚫고 우뚝 솟은 마이의 석봉에 자신의 마음 견주면서 생육신의 중심 인물인 추강 남효온, 어계 조여 등 절의파 사림들과 교유하며 일생을 마쳤다.
당시 지조 있는 사림들은 전극례의 맑은 절개와 높은 의리를 중히 여기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면서 고려 칠십이현의 충절에 비하기도 하였고, 그 임금이 아니면 섬길 수 없다 하여 수양산 중에 들어가 순절한 백이·숙제의 충의에 견주기도 하였다.
[묘소]
묘는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산주 마을에 있다. 현재 유양 조중목이 지은 신도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