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3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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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駬山廟 |
이칭/별칭 | 이산 정사(駬山精舍)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남로 132[동촌리 78]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노석 |
건립 시기/일시 | 1924년 - 이산묘 창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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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철|철거 시기/일시 | 1927년 - 이산묘 훼철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47년 - 이산묘 재건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47년 - 이산묘 회덕전에 단군, 조선 태조, 세종 배향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47년 - 이산 정사에서 이산사로 개칭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6년 - 『대한 이산 묘지』 한문본 발간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84년 - 이산묘 회덕전에 고종 위판 봉안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8년 - 『대한 이산 묘지』 번역본 발간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4년 7월 30일 - 이산묘 전라북도 기념물 제120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이산묘 전라북도 기념물 재지정 |
현 소재지 | 대한 이산묘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남로 132[동촌리 78] |
성격 | 사당 |
양식 | 팔작지붕 |
정면 칸수 | 3칸[회덕전]|4칸[동무]|4칸[서무]|5칸[제관실]|7칸[강당] |
문화재 지정 번호 | 전라북도 기념물 |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에 있는 사당.
[개설]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마이산에 있는 이산묘(駬山廟)는 면암(勉庵) 최익현의 제자이자 고종의 스승인 연재(淵齋) 송병선의 제자들이 친친계(親親契)[송병선 제자 모임]와 현현계(賢賢契)[최익현 제자 모임]를 구성하여 건립하였다. 이산묘에는 회덕전(懷德殿)·영광사(永光祠)·영모사(永慕祠)·대한 광복 기념비 등이 있다.
이산묘가 위치한 마이산은 1907년 정재 이석용이 조직한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의 집결지였으며, 고천제(告天祭)를 행하던 곳이다. 또한 조선 태조 이성계가 장군 시절 운봉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개선하는 길에 들렀다는 전설이 서려 있기도 하다.
이산묘에는 단군, 태조 이성계, 세종, 고종을 비롯하여 을사년 이후 순국한 의사·열사 및 조선의 명현들을 포함한 79위를 배향한 국내 최대의 사당이다.
[위치]
이산묘는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마이산 도립 공원의 남부 주차장 입구 오른쪽에 있다. 호남 고속도로 익산 IC를 지나 익산 분기점에서 익산~장수 간 고속도로를 거쳐 진안 IC로 진출해 바로 만나는 30번 국도에서 왼쪽으로 이동하면 된다. 이 길을 따라가다 화전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마이산 남부 주차장이 있다.
마이산 도립 공원 남쪽 입구 좌측에는 ‘주필대(駐蹕臺)’라 각자가 새겨진 암벽과 그 윗부분에 1907년 호남 의병 창의 동맹단의 집결지인 황단(皇壇) 터가 있다. 이산묘는 황단 터의 아래쪽에 있다. 주필대는 태조 이성계가 왜구를 무찌르고 개선하던 중에 머물렀던 곳으로 전한다.
[변천]
진안 사람들 중에는 연재 송병선과 면암 최익현을 존숭하고 스승으로 모신 사람이 많았다. 송병선은 제자 이도복이 진안에 우거하자 여러 번 진안을 찾아 왔으며, 최익현은 1906년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에 있는 삼우당에 머물면서 진안을 순행하였다. 이에 송병선과 최익현을 기리기 위해 친친계(親親契)와 현현계(賢賢契)를 결성하였다.
1924년 친친계와 현현계 회원들은 마이산에서 두 계를 통합하고, 송병선과 최익현을 기리는 사당을 짓기로 뜻을 모았다. 1924년 12월 18일에 충청남도 공주 숙모전(肅慕殿)에서 개최된 경향 유회(京鄕儒會)에서 진안 대표 오채열(吳采烈)의 제안으로 사당 설립을 추진하여 1925년 3월에 이산묘 건축을 시작하였다.
사당은 모두 4칸으로 서쪽은 인지재(仁知齎), 동쪽은 여택헌(麗澤軒)이라 하였다. 또 고경각(高京閣)을 건립하여 송병선과 최익현의 진영을 봉안하고, 그 역내를 통칭하여 이산 정사라 하였다. 문은 치종문(致宗門)이라 불렀으며, 회덕전(會德殿)을 건립하여 조선 태조 고황제를 배향하고 같은 해 9월 12일 향사를 지냈다.
이듬해 봄에 제사를 지내고자 했으나 일제의 탄압이 심하자 제일(祭日)을 바꾸고 제관(祭官)은 10인으로 한정하여 몰래 제사를 지냈다. 그 뒤 일본의 방해와 파괴 공작으로 1927년에 훼철되었다.
광복 후인 1947년 회덕전에 단군과 조선 태조, 세종대왕 등을 배향하고 명칭을 이산 정사(駬山精舍)에서 이산사(駬山祠)로 바꾸었다. 이후 임금을 배향했기 때문에 이산묘라고 개칭하는 것이 옳다는 성균관 사림이 의견에 따라 이산묘로 부르게 되었다. 또한 회덕전 아래 동서 양쪽에 사우를 지어 동쪽은 영모사(永慕祠)라 이름하여 조선의 명유(名儒) 40위를 배향하였고, 서쪽은 영광사(永光祠)라 이름 하여 을사늑약 이후 순국한 선열 34위를 배향하였다. 1984년에 전라북도 전주시 건지산에 있던 고종 황제의 위판을 회덕전으로 이전 봉안하여 4위가 되었으며, 2008년에는 영모사에 후산 이도복을 추가 배향하였다.
한편 1966년에 한문본 『대한 이산묘지』가 발간되었으며, 1998년에는 진안 문화원에서 번역본을 발간하였다.
[형태]
이산묘의 묘우로는 회덕전, 영모사, 영광사, 이산 정사, 강당, 비각, 외삼문, 관리사 등이 있다.
[현황]
이산묘 건립 초기에는 인지재(仁知齋)와 여택헌(麗澤軒) 등이 있었으나 도중에 훼철되고 지금은 회덕전, 영모사(永慕祠)[동무(東廡)], 영광사(永光祠)[서무(西廡)], 제관실, 강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회덕전에는 단군·태조 이성계·세종·고종을 배향하고 있다.
영모사에는 전문식(全文軾)·정희계(鄭熙啓)·남재(南在)·신이충(愼以衷)·하연(河演)·최진형(崔進亨)·이귀산(李貴山)·김만서(金晩緖)·전자온(全自溫)·전자량(全自讓)·박심문(朴審問)·강이성(姜利誠)·김기(金機)·전혜(全惠)·이달손(李達孫)·송림(宋琳)·이숙남(李叔男)·정광필(鄭光弼)·박계현(朴啓賢)·이광필(李光弼)·이항복(李恒福)·오빈(吳玭)·오형(吳珩)·손승경(孫承憬)·신중윤(辛重胤)·태한정(太漢鼎)·윤응남(尹應南)·전대승(全大昇)·김성진(金聲振)·전동흘(全東屹)·정동협(鄭東俠)·김응철(金應哲)·김감(金鑑)·김응종(金應鍾)·원성모(元成模)·이만정(李萬禎)·김경원(金慶元)·이여정(李如珵)·최만성(崔萬成)·양하룡(梁夏龍) 등 40인이 배향되어 있다.
영광사에는 송병선(宋秉璿)·최익현(崔益鉉)·조병세(趙秉世). 민영환(閔泳煥)·홍만식(洪萬植)·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고광순(高光洵)·기삼연(奇參衍)·김준(金準)·민긍호(閔肯鎬)·이석용(李錫庸)·전기홍(全基泓)·고제량(高濟亮)·김용구(金容球)·김익중(金翼中)·오인수(吳仁洙)·이재명(李在明)·안중근(安重根)·홍범식(洪範植)·김석진(金奭鎭)·정재건(鄭在健)·정동식(鄭東植)·이만도(李晩燾)·장태수(張泰秀)·유도발(柳道發)·김도현(金道鉉)·이회령(李會寧)·황왕석(黃王奭)·이봉창(李奉昌)·김근배(金根培)·윤봉길(尹奉吉)·백정기(白貞基)·설진영(薛鎭永) 등 34인이 배향되어 있다.
이산묘는 2004년 7월 30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20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