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801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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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晩緖 |
이칭/별칭 | 자술(子述),오매당(寤寐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병남 |
출생 시기/일시 | 1421년 - 김만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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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지 | 김만서 출생지 - 서울 황화방 |
거주|이주지 | 김만서 은거지 -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오룡리 |
묘소|단소 | 김만서 묘소 - 전라북도 진안군 부귀면 오산리 |
사당|배향지 | 진안 이산묘 영모사 -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남로 132[동촌리 78]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사천(泗川) |
대표 관직 | 안렴사(按廉使)|병조 판서 |
[정의]
진안 이산묘 영모사 배향된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사천(泗川). 자는 자술(子述), 호는 오매당(寤寐堂). 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 민의공(敏懿公) 김사이(金思餌)이고 장인은 영의정(領議政) 황보인(皇甫仁)이다.
[활동 사항]
김만서(金晩緖)[1421~1495]는 1438년(세종 20)에 과거에 급제한 후 안렴사(按廉使)를 지내면서 균공법(均貢法)을 건의하였고,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었으며, 문종 때에는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 진법(陳法)을 마련하여 올렸다.
1453년(단종 1)에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되었는데 당시 장인이었던 황보인(皇甫仁) 등이 수양대군이 일으킨 정변[계유정란]으로 살해되자, 충격을 받아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내려와 이후 3년 동안 은둔했다.
다시 1456년(세조 1)에 성삼문(成三問)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 여러 선비들이 화를 당한 이른바 ‘사육신 사건(死六臣 事件)’이 발생하자, 이에 심정적으로 동정하는 마음에 “신하가 되어 충절(忠節)을 다하고 몸을 바쳐 인(仁)을 이루니 어찌 다시 유감(遺憾)이 있으리오."하고, 화를 피하기 위해 드디어 진안군 부귀면 오룡리에 은둔하였다. 당시 관찰사였던 이석형(李石亨)이 불망구군(不忘舊君)의 뜻을 취해 ‘오매당(寤寐堂)’이라는 제호(題號)를 지어 보냈다.
[묘소]
묘는 진안군 부귀면 오산리에 있다. 정경부인 영천 황보씨(永川 皇甫氏)를 부좌(祔左)하였다. 1882년에 병조 판서 조영하(趙寧夏)가 지은 묘갈명이 남아 있다.
[상훈과 추모]
진안 이산묘 영모사에 배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