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1421
한자 光華敎
이칭/별칭 광화교,금강 불교,오방 불교
분야 종교/신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양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신종교
설립자 김광화

[정의]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 출신인 남학 제4세 교주인 김광화에 의해서 분파된 종교.

[개설]

광화교남학(南學)에서 분파된 교단으로 오방 불교, 금강 불교, 광화교 등으로 불렸다. 남학에서는 동학과 같이 후천 개벽(後天開闢)이라는 교리를 내세우고 앞으로 개벽되는 후천 시대의 역리는 정역(正易)에 있다 하여 『정역』이라는 책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현재는 선후천의 교역기가 되어 삼재 팔란(三災八亂)이 있으므로 이 재난을 면하고 개벽되는 후천 지상 선계(後天地上仙界)에 참여하려면 오음주(五音呪)를 외면서 심신을 수련하고 행실을 바르게 하는 신행(信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남학을 세운 이운규(李雲圭)에게 수교(受敎)한 김항(金恒)은 유교적인 측면에서 정역의 교리에 치중하는 교파를 형성하였고, 이운규의 아들인 이용래(李龍來)와 김광화(金光華)는 불교적인 측면에서 오방 불교(五方佛敎)라는 교명을 가지고 포교하였다. 그러나 김광화가 사망하자 제자들 사이에 교통 전승을 둘러싼 분규가 일어나 김용배(金庸培)는 금강 불교라는 교명으로 포교하고, 김원배(金垣培)와 권순채(權珣采)는 광화교(光華敎) 또는 광화 불교라는 교명으로 포교하게 되었다. 금강 불교는 오방 불교의 본거지인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를 중심지로 하는 운장산(雲藏山) 일대에 포교망을 넓혔지만 근래에는 거의 소멸 상태에 있다.

금강 불교는 한때 교명을 고쳐 ‘처사교’라고도 하였다. 불교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단이지만 실상 지도자나 신도들이 승려가 아니라 유교적인 바탕을 가지는 처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본교의 신행 규칙을 보면 신도는 가정마다 집 뒤에 칠성단을 만들고, 밤마다 칠성님께 정화수를 올리며 속죄·해탈·소원 성취를 기도하였다. 이런 관계로 본교의 여신도는 ‘칠성계’라는 조직으로 단합하여, 근래에는 ‘칠성교’라 부르기도 하고, 운장산 남쪽 골짜기에 설치되었던 본교의 제단을 ‘칠성대’라고 불렀다.

[김광화(金光華)]

김광화[김치인]는 초명이 치인(致寅), 개명(改名)은 광제(廣濟), 호는 광화(光華)이다. 본관은 전주이고, 1855년(철종 6)에 이서면 장등리[현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 장등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김광화 법언록』의 행장기에 의하면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만을 모셨는데 가세가 곤궁하여 16세에 인근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 중리 마을에 있는 외숙 김재영(金載永) 집에 의탁하여 살았다. 약관에 무주 후령으로 이거, 다음해에 연산 덕동으로 옮기고, 3년 후 전주 묵동으로 옮겼다. 여기서 4년 후에 은진 장승동[현 충청남도 논산군 하야곡면 양촌리]으로 옮기고, 다음해에 은진 여술[현 논산군 하야곡면 소재지]에 사는 서상태(徐相泰)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그리고 1881년 27세 때 고산 선야동(仙冶洞)에 가서 집을 짓고 도를 닦았다고 한다.

『광화 김처사 법언록(光華金處士法言錄)』에 의하면 김광화는 어려서부터 향학심이 강하였지만 집안이 배울 수 없는 형편인 것을 초조하게 생각하여 자신이 오랫동안 체계적인 유도의 공부를 할 처지는 아니지만 틈틈이 어깨 너머 공부로 상용적인 경술이라도 배우려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는 그 당시 사람들이 흔히 동경하던 도사라도 만나 도술 공부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빠져, 틈만 있으면 명산대천으로 도인을 찾아 다녔다고 한다. 그러던 중 대둔산 동쪽 기슭에 있는 진산 태고사에서 한 도인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는데 당시 김광화는 20세였다.

[남학에서 광화교까지]

이운규에 의해 창시된 남학은 아들 부련(夫蓮) 이용래(李龍來)에게 전수되고, 이용래의 아우이자 이운규의 아들인 이일수(李一守)와 김광화에게 전교하였다고 한다. 김광화가 처음 이용래를 만났을 때 이용래는 13자의 구령주(九靈呪)를 주면서 이것을 부지런히 외움으로써 먼저 노둔한 흉금을 씻어 마음을 연 뒤에 점진하라고 하였다.

김광화는 이일수를 맞이하면서부터는 점차 도체가 밝혀지고 선야동 수도장을 찾아드는 수도자를 중심으로 교단의 기초가 닦아지기 시작하였다. 김광화의 뒤를 이어 광화교의 제5세 교주가 된 김용배(金庸培)와 김경배(金敬培) 등도 이곳 선야동(仙冶洞) 수도로 결연이 된 것이다. 고산 선야동에 모여드는 교도들의 수가 증가됨에 따라 1888년[34세]에는 고향인 주천면 대불리에 도장을 설치하고 ‘오방 불교(五方佛敎)’라는 명칭으로 포교를 시작하였다. 이로 부터 포교는 용담·진안·장수·무주·금산·진산·운주 등 전라북도와 연산·논산·공주 등 충청남도 일대, 그리고 영남의 일부 지방에까지 확장되었다.

대불리 도장의 확장으로 인하여 김광화는 한때 거주지를 금산 삼암리로 옮겼다가 1893년에는 대불리 중리 마을로 환거하였다. 이때 오방 불교의 교주는 이일수였지만 교단 운영의 실제적인 권한은 김광화에게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김광화남학의 교명을 ‘오방 불교’라고 한 뜻은 오음주(五音呪)가 오행의 이치에 통하는 것처럼 본교에서 신앙하는 미륵불이 오행의 이치에 통하는 부처라고 본 데 있다. 오행은 오방의 이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불에도 오방불이 있고 이 오방불의 중앙을 맡은 주불이 용화불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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