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3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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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都堂山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도당산~행정리 산 36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박상일 |
성격 | 성곽|산성|석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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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테뫼식 |
건립시기/연도 | 삼국시대 |
관련인물 | 김유신(金庾信)[595~673] |
높이 | 약 4m |
둘레 | 약 823.5m |
소재지 주소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도당산~행정리 산 36 |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의 도당산과 행정리에 걸쳐 있는 삼국시대 석축 산성.
[건립경위]
도당산성은 진천군내 서편의 낮은 구릉지에 축조된 산성으로서 넓은 평야 지대를 이루는 진천 지역의 외곽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삼국시대에는 만노군의 치소(治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축조 시기와 연혁을 알려주는 문헌 기록은 없고,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 조선시대의 각종 지리지에 도당산성[都堂山城 또는 都唐山城, 陶唐山城으로 표기됨]이 진천현의 서쪽 3리에 있는데 돌로 축조하였고, 그 둘레는 1,836척이며 성안에 우물이 2개소가 있으나 성은 이미 폐허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축성 위치와 출토 유물로 보아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며, 김유신(金庾信)[595~673]의 출생지 또는 유소년 시절의 연무장이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위치]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의 길상사(吉祥祠) 뒤쪽 해발 200m의 산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
[형태]
도당산성은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의 속칭 ‘당재’로 불리는 해발 약 200m의 야산 정상부와 동쪽의 작은 계곡을 둘러싸고 축조한 테뫼식[정상을 중심으로 산의 7,8부 능선을 따라 둘러쌓음] 석축 산성이다. 조선시대 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듯이 돌로 쌓은 산성이다.
전체적인 평면 형태는 방형에 가까우나 동벽·남벽·서벽은 성 안쪽으로 휘어 들어왔고, 북벽은 성 밖으로 약간 둥글게 내밀었다. 또한 서남·남동·동북 모서리의 3곳은 바깥으로 돌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곳보다 많은 석재로 높게 축성하여 곡성(曲城)을 형성하였다. 이 가운데 서남쪽 모서리는 특히 밖으로 많이 돌출하였고, 할석을 사용하여 약 4m 높이로 비교적 높게 쌓았다. 산성의 둘레는 실측 결과 823.5m로 확인되었으며, 동서 방향과 남북 방향의 중간 폭은 각각 약 180m이다.
성벽은 산정부에 가까운 7~9부 능선을 따라 축조하였는데, 북쪽과 서쪽이 대체로 높고 남쪽과 동쪽이 비교적 낮은 위치에 성벽을 축조하여 산성의 중요한 출입로가 동쪽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성벽의 외면은 할석으로 정연하게 쌓아 올리고 내면은 삭토하여 다지면서 석재를 채워 넣는 방법으로 축성하였는데, 지금은 지상의 성벽이 거의 붕괴되고 성벽 안쪽을 따라 길이 나 있으나 지하에 매몰된 부분도 많이 있어 발굴을 하면 성벽의 원형이 부분적으로 노출될 것으로 추측된다. 성벽 축조에 사용된 석재는 대부분 할석으로, 채석 과정에서 대충 다듬은 판석을 포개어 쌓되 외벽만을 가지런히 하여 쌓아 올렸다.
남쪽 성벽의 밖에는 해자(垓子)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성벽의 기단에서 5m 정도 떨어진 곳에 성벽을 따라 폭 5m 정도의 구덩이를 파냈는데, 해자 밖으로 토석재의 무더기가 있어 마치 이중의 성벽처럼 보인다.
도당산성의 입구에 해당되는 동벽은 남북의 상당 부분이 무너져 내렸고, 중앙부는 1927년에 김유신을 모신 진천 길상사를 지으면서 크게 훼손되었다. 흥무전(興武殿) 삼문 밖의 축대는 진천 길상사 건축 때 쌓은 것이나 위치상으로는 산성의 동벽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지와 수구는 지형상 주요한 통로가 되는 동쪽의 계곡 부분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 진천 길상사로 인하여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이 밖에 현재의 상태로는 남벽의 서쪽이면서 남서 곡성의 동쪽 아래에 성벽의 일부가 끊어진 부분이 있어 문지로 추정되며, 서벽의 북단부에 능선을 따라 내려가는 길이 있는데 이곳에도 문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남아 있는 시설은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2개가 있었다고 기록된 우물은 현재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이곳의 지형으로 보아 동쪽 계곡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진천 길상사의 남쪽에 ‘약수’라는 이름으로 잘 정화된 우물이 있는데 이곳이 옛 우물터의 하나로 추정되며, 또 한 곳은 성내의 중앙인 진천 길상사 뒤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진천 길상사의 신축으로 자취가 없어졌다.
[현황]
도당산성의 성벽은 대부분 붕괴되었으나 성안에는 평탄한 대지가 곳곳에 있고, 기와편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건물지로 추정된다. 성안에서 가장 높은 지대인 서북쪽에는 성벽 안쪽에 동북-서남 방향으로 길이 60m, 너비 25m 정도의 비교적 넓은 대지가 있는데, 이곳에 장대(將臺)와 같은 중요한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 서남벽과 북벽의 안쪽, 그리고 남동쪽 모서리에도 기와편이 산재한 평탄 대지가 있어 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생각된다. 또한 현재 진천 길상사가 위치하는 동쪽 계곡은 성벽 안쪽으로 넓은 대지를 이루어 도당산성 안에서 가장 크고 중심적인 건물지로 추정되나, 현재는 원형을 크게 잃었다.
출토 유물은 토기와 기와편이 대부분인데, 토기는 승석문(繩席紋)이 타날된 경질 토기가 주종을 이루고 기와편은 회백색의 얇은 연질 기와에 직선문이 있는 것과 두텁고 어골문(魚骨文)이 새겨진 것들이 발견된다. 유물들은 대체로 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에 걸친 것으로서 도당산성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의의와 평가]
출토 유물의 연대가 신라에서 고려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도당산성은 진천 역사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