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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0382
한자 烽火山烽燧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터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원덕리 산 33|사석리 산 56-1
시대 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박상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봉수 터
원건물 건립시기/일시 삼국시대|고려시대
소재지 주소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원덕리 산 33|사석리 산 56-1지도보기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원덕리사석리 사이 봉화산 정상에 있는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 봉수 터.

[변천]

봉화산 봉수는 남쪽의 청주 것대산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의 음성 망이산 봉수로 연락을 취하던 간봉으로, 서쪽에는 문안산성(文案山城)이 있고 북쪽으로는 도당산성(都堂山城)이 있어 전략상 요충지에 세워진 봉수대였다. 『상산지(常山誌)』에 1731년(영조 7)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왕의 특명으로 이곳에 봉수대를 설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도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고려시대 또는 그 이전부터 봉수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기와 기와편의 경우 고대 삼국 시기의 것도 발견되고 있어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중요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 때는 남과 북의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지던 곳으로, 이후 사람들이 정상부 밑까지 경작지로 만들면서 봉수 시설이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위치]

봉화산 봉수 터는 청주에서 진천읍내로 들어가는 잣고개에서 동쪽으로 올려다 보이는 해발 410m의 봉화산 산정에 위치하고 있다. 잣고개에서 진천 쪽으로 150m 지점의 6·25격전지 기념탑에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쉽게 이를 수 있다.

[현황]

일제강점기인 1942년에 간행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를 보면 가로 5간, 세로 5간, 높이 3척의 석축이 완전하게 남아 있다고 하였으나 현재 유구는 거의 파괴되었고 동쪽 면에 석축의 일부가 남아 있다. 또한 산정을 넓게 평지로 만들고 예비군 참호와 교통호를 길게 파놓아 원형이 크게 훼손되어 있다. 정상부의 면적은 약 330.58㎡로 정남북 방향으로 긴 장방형이며, 폭 3~6m의 토루가 봉화대를 한 바퀴 돌고 있어 봉화대가 멀리서도 잘 보일 수 있도록 나무를 베어냈던 한계선처럼 보인다. 여기저기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의 기와와 토기, 백자편이 흩어져 있다.

[의의와 평가]

봉화산 봉수 터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남쪽으로 미호천을 둘러싼 평야와 청주 방면이 나지막한 구릉지 너머로 보이고, 북쪽으로는 진천읍내와 평야를 지나 음성의 망이산 봉수가 아득하게 조망된다. 또한 서쪽으로는 정면에 문안산성이 거의 같은 고도로 보이고, 남서쪽으로는 천안 방면의 도로가 보이는 등 한눈에도 군사적 요충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예비군 참호가 설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고대로부터 내려온 요지로서 복원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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