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708 |
---|---|
한자 | 金宗喆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연승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효자.
[가계]
본관은 강릉(江陵). 영조 때 진천 출신의 이름난 효자인 모암(慕庵) 김덕숭(金德崇)[1373~1448]의 후손이다.
[활동사항]
김종철(金宗喆)[1755~1817]은 타고난 재주와 슬기가 뛰어나고 성격이 엄정했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깊어 평상시에도 부모가 즐거워하지 않는 일은 하지 않았고, 항시 부모 곁을 지켰으며, 절에 들어가 공부할 때도 수시로 내려와 문안 인사를 올렸다. 여덟 살 때 어머니 송씨가 병이 나자 노비와 동행하여 의원을 찾아 나섰다가 밤길에 호랑이를 만나게 되었다. 노비가 몹시 놀라 넋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거리자 “어머니의 병환이 위급한 이때 촌각을 지체해서야 되겠느냐?”면서 노비를 재촉하며 앞으로 나서니 호랑이가 길을 비켜 주어 무사히 목적지에 당도하여 약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약을 구해 돌아오려는데 아직 날이 밝지 않아 노비가 자신이 먼저 약을 가지고 갈 테니 날이 밝은 후에 오라고 하자 “위급한 어머니 곁을 어찌 잠깐이나마 떠나 있겠느냐?”며 돌아오는 길에 다시 호랑이가 나타났다. 그리고 호랑이가 칠흑 같은 밤길을 대낮처럼 밝히며 앞길을 인도해 주어 무사히 집 앞에 도착하자 호랑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장성해서 아버지가 풍으로 쓰러지자 변을 맛보면서 병세를 살폈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병간을 하는 등 극진한 효심을 다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려고 할 때 꿈에 도사가 나타나 그의 지성에 감동했다며 집 뒤 팽나무 아래 진좌(辰坐)에 묘를 쓰라고 자리를 일러 주었다고 한다. 부모의 삼년상 동안 애통해하며 아침저녁으로 성묘를 한 탓에 그가 다니는 길에는 풀이 자라지 못하였다. 생전에 부모님이 거처하던 곳을 보면 울고, 손때 묻은 곳이나 흔적을 보면 통곡하여 몸이 수척해져서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탈상한 후에는 하루도 성묘를 거르지 않았으며, 제삿날에는 돌아가셨을 때와 똑같이 슬퍼하였다. 만년에는 종가가 일백여 리나 떨어진 먼 곳에 있었지만 한 번도 제사에 빠지지 않았다. 한 번은 제사에 가는 중도에 큰비가 내려 냇물이 범람하여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홀연 한 사람이 나타나 도움을 주어 건널 수 있었다. 감사의 인사를 하자 그 사람은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묘소]
묘소와 비가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68년(고종 5) 감사 민치상이 조정에 글을 올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