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8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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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蠶業 |
영어음역 | jamup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승철 |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고치를 생산하기 위해 뽕을 길러 누에를 치는 산업.
[개설]
잠업은 오랜 고대로부터 의복을 생산하기 위한 우리 민족의 중요한 산업의 하나로 발전해 왔다. 우리나라 잠업의 역사는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미 이때부터 양잠에 대한 지식과 기술이 상당히 발달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도 고관의 의복이 거의 비단으로 지어졌을 정도로 양잠이 크게 장려되었다.
[변천]
충청북도 진천군의 경우 1415년(태종 15)에 양잠소가 설치되어 고치와 생사를 수집하여 명주실을 직접 생산하였다. 특히 세조 때는 종사법을 발표하여 대농가는 1호당 300그루, 중농가는 200그루, 소농가는 100그루의 뽕나무를 필히 심고 양잠할 것이 의무화되었다. 그 후 중종 조에 이르러 양잠은 사치 풍조를 조장하는 원흉이라 하여 금지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양잠을 적극 장려하면서 생산량은 증가하였으나 식민지 정책에 따라 고치는 염가로 수매되었다. 해방 후 한동안 침체 일로를 걸었으나 5·16군사정변 이후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계기로 잠업은 새롭게 태어난다. 즉 매우 강력한 잠업발전 5개년 계획이 수립되고 잠업은 수출 산업으로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하지만 잠업의 이런 발달은 공업화에 따른 합성 섬유의 출현과 저가 공세, 도시화에 따른 농촌의 인력난, 그리고 중국산 생사의 대량 유통 등으로 인해 생산량은 급감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현황]
1. 양잠 가구 수 및 생산량 변화 추이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충청북도 진천군의 양잠 가구 수는 1986년 170가구에서 1991년 63가구로 대략 1/3의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이러한 감소세는 춘잠과 추잠 모두에서 비슷한 양상을 보이지만 춘잠보다 추잠에서의 감소세가 더욱 뚜렷하다. 즉 소잠량은 1986년 444상자에서 1991년 268상자로 떨어졌고 수매량은 1986년의 13,522㎏에서 1991년 6,631㎏으로 절반 이하의 수준으로 감소되고 있다.
2. 상전 면적 변화 추이
잠업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 기반은 뽕밭인데 그 면적은 계속 급감하고 있다. 상전면적은 1986년의 520,000㎡에서 1991년 151,100㎡로 대폭 축소되었다. 1991년 현재 진천군에서 상전 면적이 가장 넓은 곳은 이월면으로 48,300㎡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어 진천읍이 39,300㎡, 문백면은 30,000㎡인 것으로 각각 나타났다. 그러나 상전 면적은 기설, 신설 모두 줄고 있으며 특히 기설 상전의 폐쇄가 단기간에 극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3. 읍면별 양잠 가구 수 및 생산량
1991년도 진천군의 읍면별 양잠 현황은 진천읍이 23가구, 이월면 19가구, 문백면 11가구의 순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소잠량과 수매량은 이월면이 107상자 2,510㎏으로 가장 많았으며 진천읍이 8상자 2,342㎏, 그 뒤를 문백면과 초평면이 잇고 있다. 그밖에 백곡면에서 소량 이루어지고 덕산면에서는 전혀 양잠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