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1355 |
---|---|
한자 | 元長管山神祭 |
이칭/별칭 | 산제사,산제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장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재원 |
성격 | 민간신앙|마을 제사 |
---|---|
의례시기/일시 | 음력 정월 열 나흗날 자정 |
의례장소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장관리 상산 중턱 |
신당/신체 | 산제당|장수바위 |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장관리 원장관부락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원장관 산신제는 원장관부락 서편에 있는 상산(常山) 중턱에서 음력 정월 14일 자정에 지내는 마을 공동의 제사이다. 이를 산제사 또는 산제라고도 한다. 산신제는 마을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무나 행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제관을 선출한다. 산신제일로부터 3~4일[음력 정월 10~11일 사이] 전쯤에 열린 동회(洞會)에서 오행법(五行法)에 따라 생기복덕(生起福德)에 맞는 제관 4~5명을 미리 뽑는다. 제관을 뽑을 때에는 오행법 외에도 결격 사유가 없어야 하는데, 제관이 될 개인이나 집안이 상중(喪中)이거나 병자·노약자·임산부도 없어야 하고 심지어는 집에서 기르는 가축도 결점이 없어야 할 정도로 엄격하였다.
제관이 선출된 이후에는 산신제일(山神祭日)까지 마을 전체가 근신에 들어간다. 제관은 3일간 목욕재계를 하며, 마을 전체가 정갈하고 부정이 타지 않도록 조심하며 산신제를 준비한다. 마을 입구와 제관의 집 대문에 금줄을 두르고 황토를 뿌려 부정의 침입을 막는다. 마을 입구에 기둥을 세워 왼새끼를 꼬아 만든 금줄을 치는데, 금줄에는 볏짚 그루터기가 한 뼘씩 나오게 꼬고 한지를 길게 오려서 끼웠다. 여기에 붉은 고추나 솔가지 또는 가시가 있는 엄나무를 끼우기도 했는데 지금은 대개 생략하고 있다. 음식 또한 고기와 생선 등을 삼가며, 마늘·파 등 자극이 있는 음식을 금하였고, 음주·흡연 등도 금하는 등 매우 제한된 활동과 음식으로부터 부정을 타지 않게 하였다.
제수(祭需)는 소고기 또는 돼지고기, 노구메[祭飯], 조라술[祭酒]을 올리는데, 그 비용은 각 가정에서 갹출하여 사용한다. 이틀 전날인 정월 열 사흗날에는 제단을 청소하고 조라술을 담그는 일을 하였다. 하루 전날인 음력 정월 열 나흗날 오전에는 제물을 준비하여 산제당으로 올리고, 저녁 무렵에는 진설을 하고, 해시(亥時)를 지나 보름을 맞는 자정에 산신제를 올렸다.
[연원 및 변천]
원장관 산신제가 언제부터 산신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산신제를 지냈는지 기록은 없으나 조선시대 이전에도 산신제를 지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산신제는 부락민의 단합과 결속을 이끌어 낼 수 있는 행사인데, 산제당은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사건으로 1972년도에 전국적으로 훼철(毁撤)되었을 때 사라졌다. 그 후 산제당 위패(位牌)를 모신 위치에 콘크리트로 위패를 조성하여 산신제를 지내 오다가 2000년도에 출향 인사들의 성금으로 패널식 조립식 건물을 건축하고 매년 산신제를 올리고 있다.
[신당/신체의 형태]
산제당(山祭堂)은 진천읍 장관리 원장관부락의 서편[지금의 진천종박물관 뒤의 산]에 위치한 상산의 7부 능선에 자리 잡고 있는 장수바위 앞쪽에 있으며, 이 장수바위를 산신으로 모신다.
[절차]
제관은 음력 정월 열 나흗날에 제물을 차린 후 해시를 지나 자정에 산신제를 올렸다. 산신제를 지내는 순서는 ①설찬(設饌)→ ②헌작(獻爵)[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 ③독축(讀祝)→ ④단배(單拜)→ ⑤소지(燒紙)→ ⑥철찬(撤饌) 등으로 이루어진다.
[축문]
원장관 산신제의 축문 내용 중에 “우리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일 년 내내 강녕하옵니다. 이에 해마다 제물을 올리면서[終歲康寧 歲薦其苾]”라는 구절을 보면 매년 정례화하여 철저히 지켜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 박준호 박사가 국역한 축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해의 차례는 ○○년 정월 ○○ 15일 ○○에,/ 유학(幼學)[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 ○○○은/ 감히 상산(常山)의 신명(神明)께 분명히 고하나이다./ 진천의 서북쪽 출입구에는 우뚝하게 상산이 솟아 있는데,/ 천문과 지리를 차례로 살펴서 고을의 한가운데 터전을 세웠습니다./ 보부(寶符)를 깊이 간직하고 천고(千古)토록 지령(地靈)을 길렀으니,/ 복천(福泉)이 졸졸 흐르고 서운(瑞雲)이 뭉게뭉게 피어오릅니다./ 생각건대 우리의 장관리(長管里)는 언덕을 나누어 집터를 잡았는데,/ 옛날부터 살아온 사람들은 혜택을 입은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지론을 빼앗김이 없이 화평하고 화락하였기에,/ 기도를 올리면 반드시 영검이 있어서 재앙을 없애버림이 분명하였습니다./ 길일을 내리시니 새 봄 정월의 보름인데,/ 비박(菲薄)하게 등불과 제단을 갖추고 재물을 모아 정성을 바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존귀하신 신령님께서는 별과 같이 일찍 출발하시어,/ 묵묵히 진기(疹氣)를 소멸하시고 깨끗이 요정(妖精)을 소제(掃除)해 주소서./ 예는 간소함을 소중히 여기시니 혹시라도 형통하지 않음이 없어서,/ 우리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일 년 내내 강녕하옵니다./ 이에 해마다 제물을 올리면서 오로지 신령님만 우러러보옵니다./ 간소한 한 잔 술을 바라건대 흠향(歆饗)하시옵소서[維歲次 干支 正月干支朔 十五日干支 幼學 ○○○ 敢昭告于 常山之神/ 鎭之乾門 倬彼惟常 秩察上下 立極中央 深藏寶符 千古毓靈 福泉潺潺 瑞雲英英/ 惟我長管 分崗点宅 粤惟舊人 久矣蒙澤 無奪其論 以和以樂 有禱必應 去灾明苦/ 吉日是降 春正月圓 薄具燈壇 鳩財輸誠 伏願尊神 夙駕如星 潛消疹氣 汛掃妖精/ 禮貴尙簡 無或不亨 同我一里 終歲康寧 歲薦其苾 惟神之仰 草草一尊/ 庶幾 尙饗].”
[부대행사]
부대행사는 특별한 것 없이 일반적인 행사였다. 산신제를 마쳤다는 신호(信號)[옛날에는 횃불을 사용했으나 화재의 위험으로 랜턴을 사용한다고 함]를 보내면 각 가정에서도 집 마당이나 부엌·장독대 등에 볏짚을 열십자[十字]로 놓고 백설기 한 시루와 정한수[井華水]를 올리고 치성을 드린다. 정월 보름날 날이 밝아 온 동네 사람들이 큰 마당으로 모이면 제물로 사용했던 고기를 가구마다 한 근씩 나누어 주었으며, 음복례(飮福禮)을 치른 후 부락민들의 친목을 다지는 풍물놀이와 윷놀이가 자연스럽게 이어지곤 했다.
[현황]
원장관 산신제는 다른 지역의 산신제와 특이하게 다른 점이 있다. 먼저 제관으로 뽑힌 사람들은 미리 역할을 분담하지 않고 산신제 당일 상황에 따라 역할을 분담하는 방안을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제례 절차 중 분향(焚香)이 없으며, 위패는 하나인데 생돼지를 머리, 앞다리, 뒷다리의 셋[三脚]으로 나누어 진설하고, 메[祭飯]와 조라술도 각각 셋을 올렸다. 그리고 축문을 읽은 후 큰절을 한 번만 올리는 것이 특이하다. 예전부터 고을 수장들이 기우제를 이곳 상산의 산제당에서 행하였고, 광복 후에도 군수들이 기우제를 지냈으며, 2001년까지도 가뭄에 군수가 와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