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13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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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城袋里山神祭 |
이칭/별칭 | 산제,산고사,동산제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성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재원 |
성격 | 민간신앙|마을 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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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시기/일시 | 음력 정월 초사흗날 밤 |
의례장소 | 성터부락 남쪽 무제봉의 정상 부근 |
신당/신체 | 큰 바위 |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성대리 성터마을에서 마을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기 위해 지내던 마을 제사.
[개설]
성대리 산신제는 험준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는 성터마을에서 산짐승 피해가 많이 발생하자 이를 막아 달라는 의미와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며 매년 정월 초사흗날 밤에 지내는 마을 공동의 제사이다. 이를 산제(山祭), 산고사(山告祀), 동산제(洞山祭)라고도 부른다. 마을 뒷산에 있는 큰 바위 아래에 산제당[산신당(山神堂)]을 짓고 그 곳에서 산신제를 지냈다. 산신당에는 ‘산신국사지위(山神國士之位)’라는 위패를 봉안했다고 한다.
산신제를 지내는 제관과 축관은 다른 곳과 달리 이곳에 오랫동안 대대로 살고 있는 해주오씨(海州吳氏) 성을 가진 주민 중에서 정하였다. 산신제를 지내는 제관과 축관의 집 앞에는 황토 세 뭉치를 출입문 앞에 놓아 부정한 사람들의 출입을 삼가도록 하였다.
산신제를 지내기 위한 준비 과정 중의 금기는 다른 지방의 습속과 거의 동일하다. 마을의 모든 사람은 비린내 나는 고기와 생선 등을 먹지 못하고 술과 담배도 일체 입에 대지 못한다. 산신제를 지내는 날에는 외부에서 손님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고, 일단 들어오면 이 날에는 나갈 수가 없다. 산신제 날에 마을에 부정한 일, 즉 사람이 죽거나 출산을 하거나 하는 등의 일이 생기면 산신제를 드리지 않고 연기하였다고 한다.
[연원 및 변천]
성대리 성터마을에서 산신제를 지내기 시작한 시기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나 마을이 형성된 이후 계속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1997년 서원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에서 조사 보고한 『진천의 민속』에 의하면 1935년에는 진천 보련(寶蓮)의 만뢰산신제(萬賴山神祭)가 있었고, 1971년에는 백곡면 성대리 산신제와 초평면 금곡리 산신제가 조사된 바 있다. 성대리 산신제는 2001년 마을 이장이 교체되면서부터 봉안하지 않고 있다.
[신당/신체의 형태]
마을의 위치가 험준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 성터마을 남쪽 무제봉(武帝峰)의 정상 부근에 있는 큰 바위 아래에 산제당(山祭堂)을 짓고 그 곳에서 산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은 큰 바위만 현존하고 있다.
[절차]
제관[헌관, 축관, 소임]은 3~5일 전부터 목욕재계하고 제를 지내는 동안 금주·금연·금색 등의 금기를 지켰으며, 동민들도 근신하였다. 제일에 제관들이 진산인 무제봉의 산제당에 올라가 술·떡·돼지머리·과일 등을 차려 놓고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냈다. 성대리 산제사를 모시는 순서는 일반적인 산신제와 동일하다. ①분향(焚香)→ ②헌작(獻爵)→ ③독축(讀祝)→ ④재배(再拜)→ ⑤소지(燒紙) 올리기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산신제가 끝나면 제관들은 가구별로 산신의 감응을 알기 위하여 소지를 올리고 산에서 내려와 음복한다. 산신제를 지낼 때에 축문을 읽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축문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별도의 부대행사는 없었으나 제사가 끝난 후 주민 모두가 음복을 하면서 동시에 종교적 일체감을 생활로 연결시키는 기능을 가진 마을회의를 개최하였다.
[현황]
성대리 산신제는 8~9년 전만 하더라도 봉행하였으나 마을의 책임자인 이장이 교체되고 시대적 상황이나 준비 과정에서의 어려움, 실시상의 문제, 종교적 이해관계 등이 얽혀 지금은 지내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