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14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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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水-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미역수마을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한석수 |
성격 | 전설|지명 유래담|절 내력담(來歷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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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등장인물 | 중|신도|빈대 |
관련지명 | 백련암|편각사|미역수 절|빈대절|미역수마을 |
모티프 유형 | 미역수마을의 지명유래|빈대로 인해 망한 미역수 절 |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미역수마을에서 백련암과 빈대에 관련하여 전해 오는 이야기.
[개설]
「미역수 절과 빈대」는 빈대 때문에 백련암이 망하였다는 전설이다.
[채록/수집상황]
1982년 진천문화원에서 출간한 『내 고장 전통 가꾸기』와 1994년 진천군지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한 『진천군지』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고려 초기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미역수마을 뒷산에 절이 있었으니, 이름은 편각사 또는 백련암이라고 한다. 삼국 통일 이전 김서현(金舒玄)이 만노태수로 왔을 때 이 절에는 매우 큰 대웅전이 있었고, 백 칸이 넘는 승방이 있었으며, 불공을 드리러 오는 신도가 쉬는 방도 50여 칸이나 되었다고 한다.
부처를 믿는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백 명씩 절을 왕래하였으며, 다른 절에서 이곳을 찾는 중들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기에 날마다 식사 시간이 되면 몇 백 명이 먹을 쌀을 씻어야 했고 미역도 많이 빨아야 했는데, 미역을 빤 물이 아랫동네까지 내려갔다 하여 동네 이름을 미역수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절이 이처럼 번성하던 어느 날 빈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불공을 올리고 돌아갔는데, 이후 그 사람에게서 떨어진 빈대가 날마다 불기 시작하여 반 달 만에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그러나 중이 지키는 오계(五戒) 중 그 첫 번째가 일불살생(一不殺生), 즉 살아 있는 생물은 개미 한 마리라도 죽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중들은 빈대가 있어도 죽이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었다. 빈대는 달이 가고 해가 거듭할수록 자꾸 불어 갔다.
먼 곳에서 불공을 드리러 오는 사람은 절에서 자야만 했는데, 절의 어느 방에나 빈대가 우글거려 밤이 되면 사람의 피를 빨아 먹으려고 달려들었다. 그러면 뜨끔하게 아파서 아무리 곤하게 자고 있던 사람이라도 잠에서 깰 수밖에 없었다. 신도들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빈대 잡기에 하룻밤을 새워야만 했다. 벽에는 빈대 피가 여기저기 불그스레한 무늬를 이루게 되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몇 달이 지나는 동안 신도들은 어떻게 할까 근심뿐이었다.
중들은 벽에 있는 빈대 피를 보자마자 종이 붙이기에 바쁜 날을 보내야만 했다. 종이는 여러 겹이 되었다. 불공을 드리러 왔다가 자는 신도들은 종이를 붙인 사이에서 기어 나오는 빈대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벽에 붙인 종이는 하룻밤 사이에 빈대 피로 벌겋게 물들게 되었다. 하룻밤이 지나 아침이 되면 밤을 새운 사람들이 빈대가 있지 않나 하여 옷 터는 소리가 야단스럽게 들리곤 하였다.
법당에서 불공을 올리는 사람들도 빈대가 오르지 아니하였나 하여 불공을 끝낸 후 밖에 나와 옷을 털어 내기에 바빴다. 빈대는 대웅전까지도 번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빈대절이라는 소문이 먼 곳까지 퍼지게 되었다. 끝내 불공을 드리러 오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어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만이 간간이 절에 올 뿐이었다. 먼 곳에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오지 않게 되었다.
그 후 하루에도 몇 백 명씩 신자들이 찾아오던 절이 열 명도 채 오지 않는 절로 바뀌게 되었다. 절에 있는 승려들도 빈대에 못 이겨 차츰차츰 다른 절로 떠나 버렸다. 그리하여 끝내 절은 텅 비게 되고 말았다고 한다.
10년 전만 해도 절이 있던 곳의 주춧돌을 뒤집어 보면 빈대 껍질이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빈대가 얼마나 많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주춧돌 밑에서 껍질만 남겨 놓은 빈대의 모습은 천여 년 전의 비참했던 모습을 말해 주는 듯하다. 절이 있던 곳에 가서 땅을 파 보면 조그마한 불상이 나오는데, 그곳에 있던 유물들은 근방의 절에서 가지고 갔고 지금은 허허벌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모티프 분석]
「미역수 절과 빈대」의 주요 모티프는 ‘미역수마을의 지명유래’와 ‘빈대로 인해 망한 미역수 절’이다. 절이 번성하여 하루에도 몇 백 명이 찾아 들어 많은 쌀을 씻고 미역을 빨아야 했는데, 미역을 빤 물이 아랫동네까지 내려갔다 하여 동네 이름을 미역수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지명유래담이자, 삼국시대부터 미역수마을에 있으면서 흥성했던 절이 빈대로 인하여 망하게 되었다는 내력을 밝힌 절 내력담(來歷談)이다.
절 내력담을 담은 전설에는 대개 절을 망하게 한 빈대 등이 창궐하게 된 원인이 먼저 서술되는데, 「미역수 절과 빈대」에서는 그것이 생략되어 있다. 흥성하던 절이 망하거나 부자가 망하게 되는 데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게 마련이며, 그 원인은 대개 파명당(破明堂)을 하거나 부정하거나 악한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