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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701706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562[송강로 523]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연승

[개설]

조선시대 가사 문학의 대가인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은 한양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가사 문학의 대가로 국문학 사상 중요한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 등의 가사 작품과 시조를 남겼다. 문집으로는 『송강집(松江集)』, 『송강가사(松江歌辭)』가 있다.

진천에서 청주 방향으로 국도 17호선을 따라 달리다 문백면에 다다르면 도로변에 진천 정송강사(鄭松江祠)로 가는 길을 알려 주는 이정표가 서 있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봉죽리 쪽으로 3㎞쯤 들어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562번지[송강로 523]에 정철의 위패를 모신 진천 정송강사가 있다. 1976년 충청북도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었다.

[유배지를 떠돌다 벼슬길에 나아가 승승장구]

정철은 1536년(중종 31) 윤12월 6일 한양 장의동[지금의 청운동]에서 정유침(鄭惟沈)과 죽산안씨 사이에서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시조는 정습명(鄭襲明)이고, 고려시대 감무(監務)를 지낸 정극유(鄭克儒)의 12대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병조판서, 증조할아버지는 김제군수, 아버지는 돈령부판관을 지냈으나 정철이 출생할 당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출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큰누나가 당시 세자였던 인종의 후궁으로 입궐하고, 막내 누나가 계림군 이유(李瑠)에게 출가하면서 집안이 펴기 시작하였으며, 이때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벼슬길에 나아갔다. 정철 또한 이런 인연으로 궁중을 자유롭게 출입하며 왕자들과 친교를 쌓았고, 특히 훗날 명종이 되는 경원대군과는 친구처럼 정분이 매우 돈독하였다.

그러나 정철이 9세 되던 해인 1545년(명종 즉위년), 명종의 보위를 강화하기 위해 외척인 윤원형(尹元衡)윤임(尹任)이 일으킨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된 계림군이 죽음을 당하자 그 일족으로서 화를 입어 집안이 풍비박산되어 맏형은 모진 고문을 받고 귀양을 가던 길에 장독이 올라 3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고, 둘째 형은 이 일로 충격을 받아 공부를 포기하고 순천에 은거하였으며, 정철도 목숨만 겨우 건진 아버지를 따라 관북(關北)·정평(定平)·연일 등지의 유배지를 떠돌아다녔다.

1551년(명종 6)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정철은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 당지산(唐旨山) 아래에 정착하여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이곳에서 지냈다. 이 시기는 정철의 일생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온한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를 따라 떠돌아다니는 유배 생활을 하느라 체계적인 학문을 할 수 없었다.

담양으로 내려온 이후 10여 년 동안 정철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에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金麟厚)·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 등 호남 사림의 여러 학자들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이이(李珥)·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 등과 친교를 맺었다. 17세가 되던 해에 강항(强項)의 딸이자 김윤제(金允悌)의 외손녀인 문화유씨(文化柳氏)와 혼례를 치렀다.

1561년(명종 16) 25세 되던 해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함으로써 파란만장한 벼슬길에 나섰다. 첫 벼슬은 학생을 지도하는 일인 정육품의 성균관전적 겸 임금의 교서 따위의 글을 기초하여 바치는 지제교를 거쳐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었다. 이어 육조의 각 좌랑과 정랑을 거쳐 30세에 경기도사에 제수되었다.

1566년(명종 21) 30세에 북관어사가 되어 함경도 일대를 순시하였고, 홍문관부수찬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었고, 이어 나라의 중요한 인재를 길러 내기 위해 뛰어난 문관에게 휴가를 주어 공부하게 하는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가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후 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하였다.

[낙향과 복직으로 점철된 정치 인생]

1575년(선조 8) 동인과 서인이 분당을 하면서 본격화된 당쟁으로 서인의 중추로서 동인과 대립하던 정철이이로부터 “조정을 혼란시키는 정쟁을 일삼지 말라.”는 쓴 소리를 듣고 마음이 상하여 담양 창평으로 낙향하였다. 이후 2년 동안 창평에 은거하면서 선조가 내린 관직도 마다하였다.

1577년 계림군에게 출가했던 막내누나의 상을 당하여 고양 신원에 와 있던 정철인조의 왕비였던 인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대궐에 들어가 상례에 참여하며 정치적 모색을 하다가, 1578년 승정원동부승지겸경연참찬관이 되고, 춘추관수찬관으로 승진하여 다시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해 사간원 대사간에 제수되었으나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 사건으로 동인들의 탄핵을 받아 다른 직책에 제수되었는데 이수의 옥사 이후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이듬해에 창평으로 두 번째 낙향을 하였다.

1580년(선조 13) 44세 되던 해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다시 벼슬길에 나아갔는데 이때 가사 「관동별곡」, 시조 「훈민가(訓民歌)」 등을 지어 시조와 가사 문학의 대가로서의 재능을 드러내었다.

1581년 외직에서 돌아와 참의, 성균관대사성에 제수되지만 노수신(盧守愼)의 사직과 관련하여 선조의 비답을 쓴 글로 사헌부의 탄핵과 동인들의 공격을 받고 다시 창평으로 세 번째 낙향을 하였다. 이때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고, 전라도사로 있던 중봉 조헌(趙憲)과 교분을 맺었다. 1582년 임금의 특명으로 다시 조정에 나아가 예조참판에 이어 함경도 관찰사가 되고, 이듬해 예조판서로 승진하였다.

정철은 빠른 승진과 평소 과음이 문제가 되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지만 임금의 비호로 형조판서에 올라 동인 세력을 단죄하는 데 앞장섰다. 1585년(선조 18) 판돈령부사에 제수되었지만 동인으로부터 파당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사간원과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다시 창평으로 네 번째 낙향을 하였다. 이후 4년 여 동안 이곳에 은거하며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남겼다.

1589년(선조 22) 전라도 전주에서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을 도모한다는 비밀 상소가 올라왔다. 이 무렵 선조는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각종 유언비어로 민심이 혼란에 빠지자, 동인들이 장악하고 있던 조정에 의구심을 품고 초조해하며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 돌파구를 모색하고자 하였다.

서인 역시 적극적이며 급진적인 체제 개혁을 내세우는 동인의 공격에 계속해서 밀리고 있었다. 정여립은 동인이었고, 평소에도 선조가 임금의 자질이 부족함을 공공연하게 비판하였으므로 선조와 서인은 이를 빌미로 조정을 쇄신하고 흉흉한 민심을 가라앉힐 기회로 이용하였다.

정철은 대궐에 들어가 선조에게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계를 올린 뒤 특명으로 의정부우의정에 임명되고 기축옥사(己丑獄死)를 주관하는 위관이 되어 2년에 걸쳐 동인들을 철저하게 치죄하였다.이 과정에서 정여립과 가까웠던 많은 동인이 참살되었고, 1,000여 명의 사대부가 참혹하게 희생되었다. 이로써 동인 세력은 크게 위축되고 서인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으며, 정철은 서인의 영수로서 좌의정에 오르게 되었다.

1591년(선조 24) 정철은 왕세자 책봉을 위한 건저(建儲) 문제를 제기하여 동인의 거두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하였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고, 사헌부와 사간원으로부터 지나친 음주, 파당, 인사 문제에 대한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명천에서 진주로, 다시 평안도 강계로 유배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난 정철은 평양에서 선조를 맞아 의주까지 호종하였고, 왕명을 받고 충청도 전라도 체찰사가 되어 왜군이 점령하고 있던 남쪽으로 내려갔다. 1593년 체찰사의 임무를 소홀히 한다는 전라감사 권율(權慄)의 모함으로 북쪽의 조정으로 복귀한 뒤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왔다.

그러나 귀국 후 명나라에서 조선에 군사를 파병할 뜻이 없는 것처럼 거짓 보고된 동인의 모함을 받자 사직을 청하고 강화도 송정촌(松亭村)으로 물러나 우거하다가, 그해 12월 18일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594년(선조 27)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에서 장사 지냈고, 1665년(현종 6) 충청북도 진천으로 이장하였다.

[가사 문학의 최고봉]

정철은 우리나라 가사 문학의 대가로 시조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한국 시가 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시는 명종 때 문신인 임억령에게 배웠다. 시풍이 호탕하고 비장하며, 한문 표현 방식에서 벗어나 우리말을 자연스럽게 구사하였다. 이백의 시풍이 강하고 두보의 영향도 깊이 작용한 듯하다.

주요 작품으로는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 등 네 편의 가사와 여러 편의 시조가 『송강별집추록유사(松江別集追錄遺飼)』에 전하고 있으며, 필사본으로 『송강별집추록유사』·『문청공유사(文淸公遺飼)』, 한시를 주로 실은 『서하당유고(棲霞堂遺稿)』가 판각본으로 전하고 있다. 유고로는 후손들이 엮은 시가집인 『송강가사』와 시문집인 『송강집』이 있다.

숙종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을 일컬어 “예로부터 좌해(左海)[조선의 별칭]의 참된 문장은 오직 이 세 편뿐”이라며 정철의 가사 작품을 절찬하였다.

정철의 작품은 주로 그가 관찰사로서 외직을 떠돌 때와 당쟁에 휩싸여 담양의 창평에 은거했던 시기에 지은 것들로 은둔 가사의 정점을 보여 주고 있다. 최초의 가사인 「관동별곡」은 1580년 강원도관찰사가 된 정철이 관동 지방을 둘러보고 금강산(金剛山)을 비롯한 관동팔경을 노래한 기행 형식의 가사이다. 담양에 은거하며 자연 속에 묻혀 있던 자신에게 관찰사 벼슬을 제수한 임금의 은혜에 대한 감격을 산수(山水)에 비유하여 노래한 작품이다.

정철은 이 시기에 강원도 백성을 교화할 목적으로 「훈민가」 16수도 지었다. 연시조 형태를 취하고 있으나 각 수는 완전히 독립된 작품으로, 유교 윤리를 주제로 백성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조목별로 쓴 교훈적인 내용이다.

「사미인곡」은 서인의 우두머리로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담양으로 낙향하여 은거했던 1585년에 지은 작품이다. 임금을 사모하는 마음을, 한 여인이 생이별한 지아비를 사모하는 마음에 비유하여 드러내고 있다.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이 작품을 중국 초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에 비견하여, ‘동방의 「이소」’라고 절찬하기도 하였다.

「속미인곡」은 정철이 담양에 은거하던 시기[1585~1589]에 나랏일과 임금의 은혜를 생각하며 지은 작품이다. 「사미인곡」과 마찬가지로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젊은 여인이 남편을 사모하는 형식으로 읊고 있으나, 「사미인곡」과 달리 두 여인의 문답 형식으로 구성하였다.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모두 선조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한 일종의 유배 가사라고 할 수 있는데, 김만중송강의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글이라고 하였고, 홍만종(洪萬宗) 역시 『순오지(旬五志)』에서 뛰어난 글이라고 격찬하였다.

「성산별곡」은 정철이 벼슬길에 나서기 전인 1560년(명종 15) 24세 되던 해에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성산[일명 별뫼]의 사철 변화하는 풍경과 식영정(息影亭)과 서하당(棲霞堂)을 지은 김성원(金成遠)의 풍류를 노래한 작품이다.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賞春曲)」,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의 「면앙정가(免仰亭歌)」, 정해정(鄭海鼎)의 「석촌별곡(石村別曲)」으로 이어지는 호남 가사 문학의 중요한 맥을 형성하고 있다.

[거침없는 행보의 정치가이자 감성을 노래한 시인]

정철은 문학사적으로는 시가 문학의 거두로 우리 문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문인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매우 불운하였다.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유배지를 따라 팔도를 떠돌아다녔고, 벼슬길에 들어서서는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은거와 유배를 되풀이하는 삶을 살았다.

정철은 당쟁의 피해자이기도 했지만 가해자이기도 하였다. 정철이 정계에 진출해 활동했던 시기는 조선 초기부터 중앙 정권을 장악해 왔던 훈구 세력이 밀려나고 사림 세력이 조정의 주류를 형성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사림파는 다시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된다.

사림파가 양당으로 나뉘게 된 까닭은 이조전랑 직을 둘러싸고 벌어진 다툼에서 동인의 수장 격인 김효원(金孝元)의 집이 도성의 동쪽에, 서인의 수장 격인 심의겸(沈義謙)의 집이 도성의 서쪽이 있었기 때문이다. 훈구파를 청산하는 데 있어 동인은 급진적인 입장이었고, 서인은 온건적인 입장이었다.

정철은 서인의 수장으로서 끊임없이 동인과 대립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기축옥사로 일컬어지는 정여립 모반 사건이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정여립 모반 사건에 대해 조선 후기를 얼룩지게 했던 당쟁의 역사에 도화선 작용을 했으며, 정여립을 당쟁의 희생물로 보았다.

정여립 모반 사건은 조선사 최악의 정치 모략극이며, 변화하는 백성들의 요구에 대해 개혁할 의지가 없는 조선 기득권들의 무기력함이 빚어낸 정치적 쇼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기축옥사의 중심에 정철이 있었다.

정철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동인을 축출하고 권력을 잡지만 건저 문제로 선조의 미움을 샀고, 동인은 이를 빌미로 정철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동인은 정철을 극형으로 처벌할 것을 주장한 북인과, 극형은 면하게 하자는 남인으로 갈리게 된다. 결국 정철은 평안도 강계로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정철은 사림 세력과 훈구 세력 간의 투쟁, 사림들 사이에 벌어진 당쟁과 사화, 임진왜란 등 복잡하고 혼란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고자 거침없는 행보를 한 정치가였다. 본래 성정이 곧아서 바른말을 서슴지 않았던 탓에 조정의 당파 싸움에 연루되어 평생을 귀양살이로 떠돌아다녔다.

그러나 정철은 학문이 깊고 시를 잘 지어 우리 문학 사상 불후의 명작을 남겨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의 입에 회자되고 있는 문인이기도 하다. 정철이 지은 시조 가운데 “퍼붓는 소나기에도 연잎은 젖지 않는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의 성격의 일면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정철은 개국 초부터 민본과 훈민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왕조 시대를 살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국제민(經國濟民)의 뜻을 펼치기 위해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할 말은 해야 하고 상대의 허물을 감싸 주지 못하고 화를 입더라도 조금도 용서함이 없이 질타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 때문에 정철의 삶은 파란의 연속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효행과 충신의 도리를 다해 충효가 하나라는 것을 후세에 일깨워 주었고, 문학에도 그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낸 정치가인 동시에 문장가였다.

[정철의 면면을 만날 수 있는 진천 정송강사]

진천 정송강사는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에 있던 정철의 묘를 1665년 송시열(宋時烈)이 후손 정포(鄭浦)와 상의하여 지금의 위치인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어은골로 이장하고 지은 사당이다. 1937년에 보수하였고, 1979~1981년에 중건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입구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7호로 지정된 진천 정철 신도비, 「사미인곡」을 새긴 송강시비가 있다.

진천 정송강사는 전형적인 사우(祠宇)의 건축 방식을 따르고 있다. 외삼문인 문청문(文淸門)을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유물전시관이 있고, 내삼문인 충의문(忠義門)을 들어서면 ‘송강사(松江祠)’라는 편액을 단 사당이 있다.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으로 정철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외삼문에 있는 유물전시관에는 정철의 유품인 은배(銀盃), 옥배(玉盃), 연행 일기 65일분과 친필 편지가 전시되어 있다.

진천 정철 묘소정송강사 입구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환희산(歡喜山) 중턱에 있으며, 충청북도 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어은(漁隱)이란 지명의 유래도 묘소와 관련이 있는데, 송시열이 묏자리를 구하다 이곳의 지형을 보고 고기가 숨어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정철의 사후 담양 창평의 송강서원(松江書院)과 경상남도 영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別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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