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17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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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471[배티로 663-13]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유한영 |
[개설]
우리나라에서는 17세기 초엽부터 조선의 지식인들, 특히 남인(南人) 학자들을 중심으로 천주교를 지식의 차원에서 탐구하게 되었다. 1794년 말에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영입하는 등 조직적인 교회 활동을 펼쳐 1800년에는 교인이 10,000여 명으로 교세가 확대되었다. 이처럼 천주 신앙이 빠르게 퍼져 나가자 천주교를 공격하는 공서파(攻西派)는 1801년(순조 1) 신유박해를 일으켰다.
신유박해는 한국 천주교회에 가해진 최초의 대대적인 박해였다. 그러나 살아남은 천주교도들은 위험을 피하여 경기도의 야산 지대, 강원도나 충청도의 산간 지방, 태백산맥·소백산맥의 심산유곡에 숨어들어 천주 신앙의 전국적 확산을 촉진하였다.
[한국의 카타콤브라 불리는 박해 시대의 교우촌]
신유박해 이후 천주교도들은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피신하여 비밀 공동체를 이루며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1813년경(순조 13) 홍주 덕머리 출신인 원 베드로가 진천 땅 ‘질마로’로 피신하였고, 1836년(헌종 2)에서 1837년 사이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인 모방과 샤스탕이 진천의 교우촌을 방문하였다.
1830년(순조 30)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충청도와 경기도가 나뉘는 배티 골짜기와 그 인근에 교우촌이 자리 잡기 시작하여 1866년(고종 3) 무렵에는 15곳 이상으로 늘어났다. 기록에 나타나는 교우촌만 해도 배티, 삼박골, 은골, 정삼이골, 절골, 용진골, 동골, 지구머리, 발래기, 퉁점, 지장골, 원동, 굴티, 새울, 방축골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윤의병 신부는 진천 배티와 그 인근의 교우촌을 주 무대로 삼아 쓴 박해 소설 『은화(隱花)』에서 오래된 천주교도들의 구전을 바탕으로 피난 시절의 애환, 신앙의 기쁨과 희망을 전파하기도 하였다.
[최초의 조선교구 신학교 정착지이며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이자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는 선교지 사제 양성을 위해 1850년(철종 1) 조선교구 신학교를 세웠고, 그해 9월 신학교 교장인 다블뤼 신부[후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는 배티 교우촌에 신학교를 정착시켰다.
다블뤼 신부는 배티마을에 성당과 사제관을 겸한 초가집을 마련하고 1853년 여름까지 기거하면서 신학생들이게 소신학교 과정을 가르쳤다. 다블뤼 신부의 뒤를 이어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1821~1861] 신부가 신학교를 맡았다. 최양업 신부는 1854년 3월까지 세 명의 신학생[임 빈첸시오, 김 사도요한, 이 바울리노]을 양성하여 페낭으로 유학을 보냈다.
최양업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으로 발탁되었으나 1849년(헌종 19) 상하이에서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는 박해 시대의 상황으로 김대건 신부가 프랑스 선교사들의 안내자 역할을 맡게 되면서 1845년(헌종 15)에 먼저 서품을 받고 서해안을 통해 몰래 입국하였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는 103위 순교 성인 중 한 사람인 최경환 프란치스코이며,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도 순교하여 현재 시복시성이 추진 중이다.
최양업 신부는 1849년 4월 15일 사제 서품을 받은 뒤 7개월 동안 한국 사제로는 최초로 요동 지역에 있는 차구성당에서 중국인의 사목을 담당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입국한 최양업 신부는 선종하는 순간까지 12년 동안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황해도 등의 교우촌을 방문하여 사목 활동을 하여 ‘한국의 바오로 사도’로 불리며, 순교의 피를 흘리진 않았지만 순교자와 똑같은 삶을 살았다고 하여 ‘땀의 순교자’로도 불린다.
최양 신부의 사목 후반기는 주로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이루어졌다. 서울 주교관에 사목 보고를 하러 올라가는 길에 형제들이 살고 또 교우촌이 밀집해 있는 진천 지역에 자주 들러 신자들을 돌보았다. 한 해 동안 적어도 7,000리 이상, 일생 동안 90,000리 이상을 걸으며 헌신한 최양업 신부의 삶과 성덕은 모든 사제들의 귀감이 되고 있으며 현재 신앙의 증거자로 시복시성이 추진 중이다.
[천주가사의 탄생지이자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
최양업 신부는 전국을 순회하는 동안 장마로 길이 끊기는 7~8월에 진천 배티마을 사제관이나 그 인근에 머물며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특히 글을 잘 알지 못하는 남녀노소 교우들이 하느님을 잘 알 수 있도록 한글로 저술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4·4조의 조선 후기 대중 가사의 형식을 빌려 만든 신앙의 노래를 보급하였는데 이를 ‘천주가사’라고 부른다. 현재까지도 다수가 전해져 오고 있으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사향가」·「선종가」 등이다.
최양업 신부는 교우들에게 전례 기도와 일상의 기도 생활을 가르치기 위해 한글본 『천주성교공과』를 편찬하였고, 신앙의 가르침을 누구나 쉽게 배우고 익히도록 하기 위해 한글본 『성교요리문답』을 다블뤼 신부와 함께 편찬하기도 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언어 능력이 뛰어나 프랑스 어로 된 한국 천주교 순교자들의 기록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이라는 제목으로 로마 교황청에 올리기도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79명의 순교자들이 1925년에 복자 반열에 올랐고 1984년에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이처럼 조선의 복음화와 교리의 토착화를 위해 선구자 역할을 하던 최양업 신부는 과로에 장티푸스까지 겹쳐 만 4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929년에 채록한 최경신 바르나바의 구전에 따르면, “서울로 올라오시다가 문경 새재 주막에서 시장하신 판에 무슨 고기를 잡수신 것이 섭체가 되어 고생하시며 오시다가 진천 배티에 오셔서 고만 누워 앓으시고 거기서 임종하셨다.”라고 한다. 진천 배티공소에 매장된 그의 유해는 같은 해 11월 초 배론으로 이장되었다.
[순교자들의 고향, 고귀한 안식처]
1866년 대원군이 일으킨 병인박해로 약 8,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문헌에 나타난 진천 출신의 순교자들은 백곡 발래기의 김원중 스테파노·김선화 베드로·신성순·신성수·이성유, 진천 지장골의 오반지 바오로·이영준 아우구스티노, 이월 새울의 조대여 판크라시오·김준기 안드레아·신 서방·허 서방, 진천 배티의 장 토마스·송 베네딕토·송 베드로와 그 딸·이 안나와 그녀의 아이·송 바르나바·장 서방·이 서방, 백곡 절골의 박 프란치스코·오 마르가리타, 덕산 방축골의 김성서 파비아노·민윤명 프란치스코·김백심 암브로시오·이 베드로, 백곡 용진골의 손관보 베드로·여 요셉, 진천 동골의 오사룡, 백곡 퉁점의 윤 바오로, 진천 굴티의 김성회 바오로·김 사도요한, 진천의 김조이 막달레나 등이다.
이 밖에도 여러 무명 순교자들이 있다. ‘선참후계(先斬後啓)’의 지침에 따라 진천 배티 골짜기에서 여러 신자들이 순교하였기 때문이다. 구전과 집안 족보 등에 의해 전해진 무명 순교자의 무덤은 27기에 이른다. 진천 배티성지에는 6인 무명 순교자 묘역과 14인 무명 순교자 묘역이 있다.
또한 배티성지 최양업 신부의 성당 터 옆 마당에 유 데레사 순교자의 묘, 은골에 유 데레사 남편 순교자의 묘, 삼박골에 이 요한의 아내와 딸 순교자의 묘, 백곡공소에 박 바르바라와 윤 바르바라 순교자의 묘, 새울에 이 스테파노 순교자의 묘가 있다.
순교자들이 박해를 피해 천주교 신앙의 꽃을 피우다 신앙을 위해 피를 흘린 고귀한 땅 배티와 그 인근의 교우촌은 신앙의 증거자들과 순교자들의 고향이며 그들이 살아 숨 쉬는 고귀한 안식처가 되고 있다.
[배티성지의 연원과 위치]
배티는 순수한 우리말로 ‘배나무 고개’를 뜻한다. 한자로는 이치(梨峙)라고 표기한다. 1830년 무렵 천주교도들이 이곳에 살기 시작하였고, 1977년 그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이 알려지면서 당시 진천본당 신부였던 청주교구장 장봉훈 주교가 성지 개발을 시작하였다.
1993년 초대 배티성지 담임으로 장봉훈 신부가 부임하였고, 1999년 2대 담임으로 유한영 신부가, 2006년 3대 담임으로 이승룡 신부가 부임하였다. 어느덧 성지 개발의 역사도 30여 년이 넘었다.
서울에서 배티성지로 가는 길은 두 갈래 길이 있다. 경부고속도로와 평택·음성 고속도로를 타고 남안성 나들목으로 나와 마둔저수지와 석남사 방향으로 12㎞가량 가면 오른쪽에 배티성지 성당이 보인다. 중부고속도로 진천 나들목에서 국도 34호선을 따라 성환 방향으로 오다가 백곡면에서 지방도 313호선을 타고 중앙골프장과 안성 방향으로 17㎞ 정도 가면 왼쪽에 배티성지 입구가 보인다.
[배티성지의 모습과 구성 현황]
배티성지의 정확한 명칭은 배티 순교성지이다. 그 이유는 이곳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이 인근에 묻혔기 때문이다. 현재 성지 관내에 있는 무명 순교자의 묘는 21기이다. 6인 묘역은 배티성지 뒷산으로 약 40~50분 거리에 있는 성재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14인 묘역은 안성으로 넘어가는 배티성지 끝의 고개 오른쪽 비탈에 자리 잡고 있다. 다른 1기는 최양업 신부와 외국 선교사들이 살던 2칸짜리 초가집 사제관 겸 성당 터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는 최초의 조선교구 신학교 자리를 기념하고자 최양업 신부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초가집이 복원되어 있다.
배티성지 입구의 오른편에 안내 표지판이 세워져 있으며 가운데는 큰 바위로 된 성지 표지석이 있다. 입구 왼쪽에는 강당과 식당이 자리 잡고 있어 순례자들이 모임과 식사를 할 수 있다. 입구 왼쪽 아래에는 캠프장, 박해 시대의 유물을 재현하여 보여주는 양업전시관, 편의 시설이 있다.
성지 입구에서 오솔길 형태로 포장된 길을 20m 올라가면 ‘순교현양비’를 볼 수 있는데 병인박해 무렵에 신자들이 묶여 있었던 화강암 비석을 옮겨 놓은 것이다. 그 오른쪽 옆길로 조금 내려가면 개울 건너 양업교회사연구소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연구소는 1999년에 설립되었다.
개울을 건너지 않고 위쪽으로 걸어가면 시복시성을 기원하는 125계단과 묵주알 동산이 자리 잡고 있다. 조금 더 올라가면 2002년에 완공된 양업영성관이 있는데, 기도와 피정 교육을 할 수 있다. ‘순교현양비’ 왼쪽으로 10m 올라가면 두 명의 수녀가 거주하는 수녀원이 있고, 그곳에서 30m 위로 올라가면 최양업 신부 탄생 175주년 기념 성당, 사무실, 사제가 거주하는 사제관이 나온다.
기념 성당 오른쪽 비포장 오솔길 초입에는 짚신을 신고 괴나리봇짐을 메고 선교하러 나가는 ‘최양업 신부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그 위로 소나무가 빼곡하게 모여 있는 오솔길[십자가의 길]이 60m가량 이어지고, 길 사이사이에 14개의 기도처가 조성되어 있다. 이 14개의 기도처는 진천 지역에 흩어져 있는 연자 맷돌을 모아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도록 만들었다.
14개의 기도처가 끝나는 곳에는 야외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소나무 그늘 아래서 돌과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기도와 명상에 잠길 수 있는 곳인데 중앙에 커다란 돌 제단이 있다. 제단 맞은편의 작은 야산 꼭대기에서는 ‘배티 성모상’이 순례하는 사람을 맞이한다. 유난히 큰 성모의 손은 후덕하여 많은 은총의 선물을 전해 준다. 성지 규모는 165,289.26㎡이며 연간 30,000명이 찾아와 순례하고 있다. 배티성지로 가는 길은 아직도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찾아오는 사람들이 불편을 겪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