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17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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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佛敎 |
이칭/별칭 | 불법,불도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
집필자 | 박상일 |
[정의]
충청북도 진천 지역에서 부처님과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
[개설]
불교는 석가모니(釋迦牟尼)를 교조(敎祖)로 삼고 그가 설(說)한 교법(敎法)을 종지(宗旨)로 하는 종교이다. 부처의 가르침을 법(法)이라고 하므로 불교를 ‘불법(佛法)’이라고도 하고, 부처가 되는 길이라는 뜻에서 ‘불도(佛道)’라고 부르기도 한다. 불교의 내용은 교조인 석가모니가 35세에 보리수 아래에서 달마(達磨, dharma)[진리]를 깨침으로써 불타(佛陀, Buddha)[깨친 사람]가 된 뒤, 80세에 입적할 때까지 거의 반세기 동안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교화할 목적으로 말한 교설이다.
그러나 부처가 탄생한 때인 기원전 5세기부터 현재까지 2,500여 년 동안 불교는 원시불교(原始佛敎)·부파불교(部派佛敎)·소승불교(小乘佛敎)·대승불교(大乘佛敎) 등으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하게 발전하여 왔고, 경전도 여러 가지가 새롭게 편찬되었다. 교리나 의식도 여러 지방의 발전과정에 따라서 판이하게 달라졌으므로 한 마디로 ‘불교는 이것’이라고 묶어 말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불교의 특이한 면이다.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는 브라만(Brahman, 梵神)의 정통 교리사상이 흔들리던 기원전 5세기에 크샤트리아(Kshatriya)[무사·왕족의 계급] 계층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출생한 시기는 브라만 전통사상에 대한 회의 속에서 새로운 사상을 표출하고자 노력했던 비브라만적인 신흥사상가들이 많이 출현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브라만 전통교리를 신봉하는 승려들과 구분하여 이들 신흥사상가들을 사문(沙門)이라고 불렀으며, 불교도 비브라만적 신흥사상에 속한다. 그러나 불교는 전통 브라만사상의 형이상학적·본질론적 경향도, 사문의 회의적·부정적인 경향을 나타낸 신흥사상도 지양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부처가 형이상학적·본질론적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보류하였다는 기록이 초기 경전에 보인다. 즉, 이 세상은 끝이 있는가, 없는가? 시간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내세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등에는 답변을 보류하였다고 한다. 부처는 어떤 전제나 선입관을 근거로 하는 추론을 피하고, 모든 것을 현실의 있는 그대로 보고 아는 입장을 지향하였다. 아트만(atman, 眞我)이나 브라만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보다는 ‘인간이 지금 이 자리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실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므로 부처가 깨친 진리는 형이상학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존재하는 구체적 양식, 즉 연기(緣起)로 설명된다. 이 세계는 신이나 브라만에 의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서로의 의존관계 속에서 인연에 따라 생멸(生滅)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활의 실제 문제와 부딪쳤을 때 그 문제의 해결에 주력하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고 곧 불교이다. 불교의 교리나 이론은 자연히 인생 문제의 해결이라는 실제적 목적이 앞서기 때문에 이론을 위한 이론이나 형이상학적 이론은 배제되었던 것이다. 또 부처는 사람마다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조건과 개인적 차이에 따라서 그때그때 가르침의 내용을 달리하는 응병시약적(應病施藥的)[병에 따라 각각 약을 지어 줌]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획일적이고 일방적인 길보다는 다양한 길을 택하였다. 불교의 교리가 너무 다양하게 전개되어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반면, 사람마다 지닌 사회적 조건을 충분히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불교의 관용성을 찾아볼 수 있다.
[변천]
우리나라의 불교는 삼국시대에 수용된 이후 국가를 운영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념으로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모든 면에서 상당한 영향을 끼쳐 왔다. 불교는 한국사회에 수용된 이후 재래의 토속신앙(土俗信仰)과 융합되어 전개되었다.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는 지금 내가 사는 이 땅이 곧 부처님의 나라라는 불국토신앙(佛國土信仰)을 중심으로 국가적으로는 호국(護國), 개인적으로는 기복(祈福)의 신앙으로 이해되었다.
신라에서 고유한 성지(聖地)로 인식되었던 천경림(天鏡林)에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興輪寺)를 창건하였던 것은 이와 같은 토속신앙과의 자연스러운 융합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또한 신앙뿐만 아니라 교리적으로도 높은 수준을 유지하여 중국과 일본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고구려에서의 승랑(僧朗)의 삼론종(三論宗), 백제에서의 겸익(謙益)의 율종(律宗)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편 신라 사회에서는 진흥왕대로부터 진덕여왕에 이르기까지 불교왕명시대(佛敎王名時代)가 전개되었다. 이는 ‘왕이 곧 부처’라는 ‘왕즉불(王卽佛)’의 사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신라사회를 이끌었던 화랑도(花郞道)는 불교의 미륵사상(彌勒思想)과 전륜성왕사상(轉輪聖王思想)을 바탕으로 전개되어 화랑은 미륵의 화신(化身)으로 이해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원효(元曉)[617~686], 의상(義湘, 義相)[625~702] 등의 수많은 고승(高僧)을 통하여 불교 교리의 체계화는 물론 사상적으로도 큰 발전을 보였다. 특히 불교신앙이 일반 대중에게까지 널리 확산되어 국가의 정신적 바탕으로 기능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력이 더욱 깊어졌다. 위로는 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이 불교적 가치관에 의한 삶을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여 극락왕생(極樂往生)과 미륵정토왕생(彌勒淨土往生)을 최고의 가치로 꿈꾸었다. 국가를 운영하는 중심에 있던 왕은 왕위에 올라 불교의 계를 공식적으로 받았고, 왕사(王師)와 함께 국사(國師)를 두어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에는 자문을 받았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팔관회(八觀會)와 연등회(燃燈會) 같은 불교행사를 중심으로 모든 백성이 화합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불교는 교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상당한 발전을 보았으니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석조, 금속공예, 회화, 인쇄출판 등의 문화유산은 이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이 시행되었던 조선시대에도 왕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 불교신앙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비록 국가적으로 유교이념을 채택하여 사회적인 질서 체계를 수립하였지만 신앙은 여전히 불교에 기반을 둔 사례들이 꾸준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현황]
1. 진천 지역 불교의 유적 유물
진천 지역에 불교가 언제 들어왔는지는 문헌기록상에 보이지 않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시대에 불교가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전국적으로 전파되는 과정과 진천군 내에 현존하는 불상, 불탑, 사지 등의 유적 유물을 통하여 대략적인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
진천 지역에 남아 있는 사찰이나 유적, 유물 가운데 조성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초평면 용정리 부처당고개 북쪽 암벽에 새겨진 “진천 태화 4년명 마애여래입상”이다. “태화 4년”은 곧 서기 830년(신라 흥덕왕 5)에 해당되므로 통일신라시대의 불교문화 전성기에 진천 지역에 불교문화가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이월면 사곡리의 장수굴 옆에 조성된 마애불입상은 이곳이 김유신 장군의 수도처였다는 전설에 따라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려는 설도 있으나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현존하는 유적 유물을 통해서 볼 때 진천 지역은 통일신라시대에 불교가 크게 융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 신라는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인 김서현 장군을 만노군 태수로 임명하였을 정도로 진천 지역을 중요하게 여겼으므로, 당시 경주에서 이주해 온 귀족들에 의하여 불교가 함께 유입되었을 것이다.
조선 초기의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길상사(吉祥寺), 보적사(寶寂寺), 선적사(先寂寺), 편각사(片角寺) 등의 사찰이 진천 태령산(胎靈山)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여지도서』에는 길상사와 영수사(靈水寺)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 가운데 지금은 영수사만 남아 있다. 그리고 현재는 성림사(成林寺), 용화사(龍華寺), 대흥사[대각원, 영은암], 만성사(萬成寺), 영수사 등의 전통사찰이 불법을 전하고 있다. 옛 절터로는 길상사 터[백련암 터], 지장사 터, 대운사 터, 보살사 터, 선적사 터, 편각사 터 등의 유명사지(有名寺址)와 옥성리 절터, 사곡리 절터, 연곡리 절터, 대문리 절터, 교성리 절터, 용정리 절터, 광혜원리 절터, 양백리 절터, 명암리 절터 등의 일명사지(逸名寺址)가 알려져 있다.
2. 종파별 진천 지역의 사찰
현재는 진천군 내 곳곳에 사찰들이 세워져 불교신앙을 계승하고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曹溪宗), 한국불교 태고종(太古宗), 대한불교 원효종(元曉宗), 대한불교 법화종(法華宗), 대한불교 총화종(總和宗) 등 여러 종파로 나뉘어 소속되어 있다.
1) 대한불교 조계종
대한불교 조계종은 신라의 도의국사(道義國師)가 창시한 가지산문(迦智山門)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창종은 고려 말에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에 오교(五敎)와 양종(兩宗)[천태, 조계종인 선종]으로 되어 있던 불교를 통합할 것을 조계의 보조국사(普照國師)와 천태의 대각국사(大覺國師)가 주장하였는데 훨씬 후 보우국사(普愚國師)가 제종을 포섭하여 이루어졌다. 창종의 정신은 선교일치(禪敎一致)이며, 자각(自覺)·각타(覺他)·각행(覺行)·원만(圓滿)의 근본교리를 봉례하고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전법도생(傳法度生)을 종지로 하고 있다. 소의경전(所依經典)은 금강경(金剛經)과 전등법어(傳燈法語)로 하며, 그 밖의 경전 연구와 염불(念佛)·송주(誦呪) 등을 제한하지 않는다. 승려는 구족계(具足戒)와 보살계(菩薩戒)를 지키며 수도하여야 하고, 신도는 재가오계(在家五戒) 또는 보살계를 지키고 삼보(三寶)를 호자(護資)하며 종지를 봉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1962년 12월 14일에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불교단체 등록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진천군 내에는 용화사[진천읍 신정리], 영수사[초평면 영구리], 운용호국사[초평면 신통리] 등 3개의 사찰이 속하여 있다.
2) 한국불교 태고종
한국불교 태고종은 1970년 1월 15일 박대륜(朴大輪) 대종사(大宗師)를 종정(宗正)으로 하여 창립되었다. 조선시대 초기의 태고보우법사(太古普愚法師)를 종조(宗祖)로 하고 청허(淸虛) 부체(浮體)의 양 법맥(法脈)을 이어받는다.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자각·각타·각행·원만 등의 정신을 봉례하고, 태고종사(太古宗師)의 종풍(宗風)을 선양하여 전법도생(傳法度生)함을 종지로 한다.
소의경전은 금강경으로 하되 기타 경전의 지송(持誦)과 연구를 제한하지 않는다. 진천 지역의 태고종 소속 사찰은 진천읍에 신흥사(新興寺)[원덕리], 자재암(慈在庵)[사석리], 약수암(藥水庵)[사석리], 관암사(觀岩寺)[교성리], 대성사(大城寺)[건송리], 만성사[지암리] 등이, 덕산면에는 백운암(白雲庵)[용몽리], 백련사(白蓮寺)[한천리], 성림사[산수리] 등이 있다. 이외에도 보현사(普賢寺)[초평면 화산리], 귀암사(龜岩寺)[광혜원면 죽현리], 봉고사(奉古寺)[이월면 신계리] 등이 있다.
3) 대한불교 원효종
대한불교 원효종은 석가세존을 위시한 신라 원효대사(元曉大師)의 대승행원(大乘行願)에 의한 견성성불(見性成佛), 광도군생(廣度群生)함을 종지로 한다. 1963년 9월 10일에 김경택(金敬澤) 등이 원효대사의 호국불교사상을 널리 펴기 위해 경상북도 경주에서 대한불교 원효종 포교원으로 창립하여 문화공보부에 등록하였다. 1967년 대한불교 원효종 총 본원, 1977년 대한불교 원효종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소의경전은 원효의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기신론해동소(起信論海東疎), 법화종요(法華宗要), 열반종요(涅槃宗要) 등이다. 열반절(涅槃節)[음 2월 5일], 석탄절(釋誕節)[음 4월 8일], 성도절(成道節)[음 12월 8일] 등의 중요 법회를 연다. 진천 지역의 원효종 소속 사찰은 부봉사(富峯寺)[진천읍 금암리], 광덕사(廣德寺)[진천읍 사석리 성암], 화룡사(華龍寺)[초평면 은암리], 문성사(文成寺)[문백면 옥성리], 태봉사(泰峰寺)[문백면 은탄리], 성주암(聖住庵)[덕산면 합목리], 보덕사(寶德寺)[이월면 신계리], 청룡사(靑龍寺)[이월면 노원리], 광흥사(廣興寺)[광혜원면 월성리], 덕유사(德裕寺)[진천읍 지암리] 등이 있다.
4) 대한불교 법화종
1946년 5월 혜일정각(慧日正覺)이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義天)을 종조로 삼아 서울특별시 성북동에 무량사(無量寺)를 세우고 1969년 4월 대한불교 법화종으로 문화공보부에 불교단체 등록을 했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소의경전으로 하여 “해동신라의 원효성사가 경찬(敬讚)하신 묘법(妙法)의 현의(玄義)와 고려의 제관법사(諦觀法師)가 홍전(弘傳)하신 법화의 가르침을 계승함”을 종지로 삼는다. 본존불은 십계만다라(十界曼茶羅)와 석가모니불을 봉안한다. 본사는 1972년 무량사를 개축한 대법정사(大法精舍)이며, 월간 『법화종보』를 발행하고 있다. 진천 지역의 법화종 소속 사찰로는 관음사(觀音寺)[덕산면 합목리], 영명사[진천읍 교성리] 등이 있다.
5) 대한불교 총화종
1950~60년대에 걸쳐 지속된 비구승과 대처승의 분쟁을 종식시키려는 목적으로 1966년 결성된 대한불교화동위원회(大韓佛敎和同委員會)에서 비롯되었다. 1969년 5월 최득연(崔得淵)이 “모든 종파를 초월하여 현실과 진리가 일치하는 생활불교의 구현”을 목적으로 대한불교 총화회를 설립하여 문화공보부에 불교단체 등록을 했다. 1979년 10월 대한불교 총화종으로 개칭했다. 소의경전은 『반야경 (般若經)』이고, 본존불은 석가모니불이다. 진천 지역의 총화종 소속 사찰로는 명심암(明心庵)[초평면 용산리]이 있다.
[의의와 평가]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여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종교로서, 개인의 기복은 물론 국가와 지역 사회의 안녕을 염원하는 각종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불교는 불국토사상의 기반 위에 호국불교의 성격이 두드러져 국가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마다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구하였다. 오늘날에도 모든 법회에 국태민안과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국가와 지역사회의 발전 및 주민화합을 위해 앞장서고 있다. 또한 오랜 세월 동안 불교신앙이 계승되고 사찰이 운영되면서 수많은 유형 또는 무형의 문화재를 오늘날까지 남기어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