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김찬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0495
한자 金粲基
영어음역 Kim Changi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최소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가계]

일제강점기 구국운동의 이유로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경상북도 유림단장 김창숙의 아들이다.

[활동사항]

1927년 경상남도 진주의 진주고등보통학교, 진주공립농업학교,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진주제일보통학교 학생들은 우리나라의 주권 회복을 위해 학생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광주학생 독립운동보다 앞서 일어난 것으로, 1927년 6월 진주공립농업학교 2학년생들의 동맹휴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28년에는 진주고등보통학교와 진주농업학교가 함께 휴교에 들어갔으며, 경상남도 진주 인근의 각급학교들은 동맹휴학과 동맹휴교로 일제에 항거하였다.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 부당한 대우 등의 이유로 1930년 1월 17일에는 진주고등보통학교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500여명이 만세 시위에 들어갔으며, 오후 2시경 진주제일공립보통학교 학생 남여 400여명도 뒤를 따랐다. 이러한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자 1930년 1월 20일부터 일제경찰당국은 학생들의 시위 참가 저지와 주동자 색출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다수의 학생들이 구금·수감되었다.

1927년에 일어난 진주학생만세시위운동에서, 경상남도 진주 시내의 요소마다 격문이 나붙는 사건이 있었다. 격문을 붙인 사람은 진주고등보통학교 1학년 김찬기(당시 17세) 학생으로, 김찬기는 격문 3천여 장을 손으로 써서 하숙집마다 배부하였다. 그리고 전면에 격문을 기록하여 진주시내의 요소에 붙여 ‘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의의와 평가]

동맹휴학, 비밀결사조직, 잡지 발간 등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진 경상남도 진주지역의 학생운동은 민족의 애국심과 단결력을 고취시켜, 각 지역의 항일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찬기는 그 중의 한 사람으로 그 동안 ‘공산주의자’라는 낙인 때문에 소홀히 다루어진 인물이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원** 김창숙의 아들, 김찬기는 '공훈전자사료관'에 보면 1915년생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1927년에 17세가 될 수가 없습니다. 김찬기의 아내 손응교는 1917년 생이며, 자신의 남편이 세 살 위라고 증언한 기록이 있습니다. 호적상이든, 실제 출생년도이든 1927년에 김찬기는 17세가 될 수가 없습니다. 확인 바랍니다. 2020.09.10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