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0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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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民族主義運動 |
영어음역 | minjokjuui undong |
영어의미역 | nationalism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집필자 | 김영기 |
[정의]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하여 힘쓰는 애국운동.
[개설]
진주사람들은 “진주에는 진주정신(晋州精神)이 흐르고 있다”고 말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김시민(金時敏) 장군과 진주지역의 주민들이 보여준 애국 및 외세저항의 진주성전투, 1862년(철종 13) 농민들이 주체가 되어 봉건사회의 모순에 대해 저항하였던 농민운동,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려는 진주동학군의 치열한 전투, 일제침략기의 의병활동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진주인은 불의에 대항하여 국가의 주권을 지키는 데 늘 당당했던 것이다. 이러한 운동 중 민족주의운동으로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3·1운동과 학생운동을 들 수 있다.
[3.1운동]
1910년의 경술국치 후 일제는 신사참배, 언론탄압, 종교탄압, 군대식 학교 운영, 강제 징집 등의 무단통치를 하였다. 3·1운동은 일제의 헌병경찰에 의한 이러한 무자비한 식민통치에 대항하여 우리 민족이 일으킨 민족운동이다. 또한, 3·1운동은 독립운동의 분수령으로서, 우리 민족에게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을 안겨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진주의 3·1운동은 경성의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과 탑골공원에서의 만세시위가 있은 후 3월 10일경 거리에 격문이 나붙기 시작하였다. 10일경부터는 진주거리에 “삼남지방에는 왜 일어나지 않을까”라는 격문이 나붙기 시작하여 항일 분위기가 서서히 고조되어갔다. 16일에는 당시 진주경찰서 수사부장이었던 정용길(鄭鎔吉)이 자기집에서 다량의 태극기를 만들었으며, 박진환(朴進煥)·정준교(鄭準敎)·심두섭(沈斗燮) 등이 망진산에서 선전문 3천여장을 등사하여 거사준비를 하였다.
진주지역의 3·1운동이 타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일어났던 이유는, 일제가 만세시위의 전국적인 확산을 막기 위해 폭력적인 보안법을 적용하여 애국지사들을 사전에 구속하고 진주에 들어오는 길목을 차단하였기 때문이다. 3월 11일에는 진주헌병대가 최고비상령을 선포하여 각급 학교에 임시휴교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진주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하고 그동안 준비작업을 해온 박진환 등과 김재화(金在華)·강달영(姜達永)·이강우(李康雨) 등 중추적 인물들에 의하여 극비리에 추진되어 마침내 3월 18일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진주시내에 들어온 사람들은 옥봉동·평거동·천전리 등에서 시장으로 모여들었으며, 재판소 앞에서는 학생들이 선봉에 서서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이강우가 연단에 등장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오후 4시경에는 시위대가 도청 앞에 모였을 대 군중은 1만여명으로 늘어났다.
진주시에서의 3·1운동은 이후 5월까지 대소 20여회에 가까운 시위에 3만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하였다. 조선헌병대 사령부의 1919년 3~4월을 기록한 기록에 따르면, 진주군 내에서는 3월 18일에 약 4천명의 군중시위가 있었으며, 19일·20일·21일은 시내에서, 22일은 수곡면 창촌리에서, 25일과 31일은 문산면 소문리, 4월 3일은 일반성면 창촌리에서, 4월 18일에는 소요사건의 소송피고인을 탈환코자 하는 것을 발포하여 해산시키는 등 4개소에서 9회의 시위가 있었다.
이처럼 진주시내의 의거와 때를 같이하여 정촌면에서도 강재순(姜在淳)·허현(許鉉)·이종락(李種洛) 등에 의하여 대대적인 군중시위가 전개되어 칠암동까지 진출하였다. 18~21일 연이어 4일간에 걸친 의거에는 3만명이 참여하였다. 3월 20일에는 미천면에서 박봉제(朴奉濟)가 주동하는 야간시위가 있었으며 3월 19일에는 내평리, 3월 25일에는 문산면 소문리 장터에서, 4월 3일에는 창촌에서, 4월 18일에는 다시 진주읍내에서 폭발적인 시위가 전개되었다. 진주 3·1운동의 주체 세력은 어느 특정 계층에 한정되지 않고 농민·학생 등 각계각층이 골고루 참여하였고, 전국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노동독립대·걸인독립대·기생독립단 등의 시위도 있었다.
[학생운동]
1926년에 일어난 6·10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진주지역에서도 진주고등보통학교·진주공립농업학교·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진주제일보통학교 등이 격렬한 만세운동을 통한 주권회복 투쟁을 벌였다. 학생들에 의한 이러한 투쟁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이전인 1927년도부터 계속되었다. 이러한 운동의 시작은 진주공립농업학교에서부터 시작되어 1927년 6월에 2학년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단행하였고, 1928년 7월에는 진주고등보통학교와 진주농업학교 학생 전원이 같이 연맹휴학을 단행하였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민족차별이었다. 경찰은 두 학교의 동맹휴학을 주도한 학생 2명을 검거하였고, 이에 학부모들은 긴급 학부형회의를 소집하여 학생 2명을 풀려나도록 하였으나, 학생들은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진주농업학교 학생 일동은 동맹휴학원서를 제출하였고, 진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도 등교하지 않으려 하였다.
이러한 진주지역의 학생운동은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으로 이어져 진주에서도 수많은 학생들이 만세를 고창하며 일대 시위를 벌였다. 먼저 진주고등보통학교와 일신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500여명이 1930년 1월 17일 9시에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를 하였으며, 진주제일공립보통학교 학생 남녀 400여명도 오후 2시경에 시위운동을 하였다. 이러한 학생운동에 대해 일본 경찰들은 많은 학생과 청년들을 검거하였는데, 진주고등보통학교 학생 18인과 청년 3인을 검거하여 철야 심문하였다. 이는 또다시 진주고등보통학교와 진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무기동맹휴학을 가져왔으며, 진주제이보통학교와 진주시원여학교에서 회의를 마친 학생들이 교실에 입실하지 않고 항거하였다. 이러한 시위로 처벌받은 학생들은 퇴학 1명, 무기정학 256명, 검거 32인이었고, 청년 중 검거된 자도 4인이 되었다. 검거된 학생과 청년 중 21명은 진주형무소에 호송되어 구류처분을 받기도 하였으며, 6명은 진주형무소에 수감되고서 재판을 통해 4개월에서 6개월의 징역을 언도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찰과 법원의 판결에 대해 어린 일부 학생들은 진주학생만세시위운동으로 수감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협박장을 관리들에게 발송하여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외에도 진주농업학교에서는 비밀단체를 조직하고 문예지를 비밀리에 발간하여 학생운동을 확대하려는 시도까지 있었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전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송치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진주의 민족주의운동은 시류에 따라 갑자기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진주는 조선 후기 봉건체제의 모순에 저항하여 농민들이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한 농민항쟁이 일어났던 곳이고,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분연히 일어난 진주동학군이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지역이었다. 이런 연유로 진주는 배일의식이 강하였는데, 특히 1896년 노응규(盧應奎)를 중심으로 한 의병항쟁은 진주의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변혁의지와 저항의식이 국난극복의 의지로 나타나 거족적 민족운동인 3·1운동으로 연결되었으며, 이후 어린 학생들의 시위운동으로 이어져 주권회복운동이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