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08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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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鳴石面民間人虐殺事件 |
영어의미역 | Civilian Massacre in Myeongseok-myeon |
분야 | 역사/근현대,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장상환 |
성격 | 민간인 학살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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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50년 7월 |
발생(시작)장소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일대 |
발생(시작)장소 |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
관련인물/단체 | 육군 특무대 |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일대에서 일어났던 민간인 학살사건.
[개설]
1950년 7월을 전후하여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일대에서는 육군 특무대 부대원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졌다. 민간인 학살의 발단 경위와 경과 등에 대해서는 정확한 조사가 미흡하여, 당시 상황을 기억하고 있는 몇몇 증언들에 의해 사건의 참상이 드러났다. 이를 통해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 소재 지역별 보도연맹원들을 중심으로 인근지역의 민간인까지 포함하여 최소 수백 명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역사적 배경]
보도연맹은 1949년 정부가 좌익세력에 대한 통제와 회유를 목적으로 전향자들을 모아 조직한 반공단체였으나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와 국군, 경찰은 이들이 무조건 북한 측에 동조할 것이라는 일방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을 내리고 보도연맹원들을 무차별적으로 검속해 즉결처분했다.
[목적]
진주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을 학살하기 위한 것이었다.
[발단]
진주지역의 보도연맹원 학살도 이 같은 배경 하에 일어났다. 1950년 여름 진주가 북한군에 의해 점령될 것이 명확해지자 경찰들과 국군 그리고 우익인사들은 과거에 좌익활동을 했다가 전향한 진주지역 보도연맹원들을 미리부터 학살하기 시작했다. 학살은 진주의 외곽지역 곳곳에서 벌어졌는데, 특히 산간지역이 많은 명석면 일대는 대학살의 진원지였다.
[경과]
1950년 7월 29일에 경상남도 진주지역으로 파견된 CIC대원(육군 특무대 소속)들에 의하여 진주시 명석면 일대 우수리 갓골, 밀밭골, 솔밭골 등에서 100여 명의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되었다. 당시 증언에 의하면, 정치사상범들을 ‘마치 북어짐짝을 싣듯 세 겹으로 트럭에 얹어 싣고 그 위에 놈들이 타고 앉아 와서 늘어세운 다음 기관총으로 소사했다’고 한다. 또한 학살자들은 군복을 입지 않은 채 한복을 입었으나 모두 기관총을 어깨에 메고 실탄이 가득 찬 탄통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과]
당시 진주시 명석면 소재 지역별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장소와 인원수를 추정해보면, 우수리 송고 콩밭골 1백여 명, 우수리 갓골 내 밀밭골 43명, 관지리 삭평 건너 닭족골 50여 명, 관지리 신촌 앞 화령골 1백여 명, 용산리와 오미리 고개 수백 명 등이었다.
이 중에서 학살된 희생자의 신분과 숫자가 밝혀진 곳은 2곳이다. 형무소 수감자들이 집단학살 당한 용산리의 용산치와 정확히 43명의 민간인이 보도연맹원이란 이유로 학살당한 우수리의 갓골이다. 용산리에서 대량살육된 희생자들이 죄수복장으로 머리를 모두 빡빡 깎은 것으로 볼 때 진주형무소에 수감 중이었던 미결수나 복역수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학살 이후, 시체를 매장하기 위하여 주민들을 동원하였는데, 이 때 그들이 미군의 지휘를 받는 한국군 정보요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한국전쟁 당시 적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뿐만 아니라 미군과 한국군에 의한 학살의 진상들이 하나 둘 밝혀지고 있다. 경상남도 진주시 명석면에서 일어난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이 같은 부끄러운 역사의 하나로, 확실한 조사와 함께 희생자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